저녁밥을 먹고 길을 나섰다
가을 문턱에 들어선 8월 말의 밤공기가 걸을 만 하다
굳이 이정표를 정해놓고 걷는 길이 아니라서 마음은 느긋하다
30여년을 한우물만 파다가 이제 정년을 맞이해 놓고 보니 살아온 날도 살아갈 날도 아득하게만 느껴진다.
그래도 살아갈 날 걱정에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고 자격증도 취득하고 없는 재주를 부려서 자기소개서도 다듬어 만들고 몇 줄 안 되는 이력서를 쓰고 고치면서 마치 전쟁을 앞둔 병사처럼 설레는 마음으로 소주를 벗 삼아 밤을 지새우며 사회복귀 작업에 몰입해 보기도 했다.
이젠, 든 것이 없어서 머리가 가벼우니 후회는 접고 알량하나마 자격증도 따 놓았으니 운수 좋은날에 어디서건 날 찾아주는 행운이나 기다려 보자며 훌훌 털고 밤길을 나선 것이다.
역시 나서길 잘했다
아내는 긴 세월 처자식 먹여 살린다고 수고했으니 이제 취직 생각 말고 자기랑 하고 싶은 것 하잔다.
아내 말대로 해볼까도 싶지만 그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놀면 얼마나 놀 것이며 일만하고 살아온 삶이 노는 것도 익숙하게 잘 할수 있을까? 놀아본 놈이 논다고 나 같이 주변머리 없는 사람은 일 없이 살면 그게 창살 없는 지옥일 뿐이다.
오늘 저녁도 밥상머리에서 풀어놓으려는 잔소리 보따리를 채 다 풀기도 전에 후다닥 일어나 운동하러 간다고 나온 거였다.
오늘은 금요일이라서 출근걱정도 없으니 아내가 잠들어 무아지경 꿈속을 헤맬 때 들어 올 생각이다.
며칠 전에도 아내의 잔소리가 싫어서 무작정 걷고 걸었더니 하마 50리길을 족히 걸은 듯하다. 저녁에 나가서 새벽 4시가 돼서야 들어왔으니 얼추 그쯤은 될 것이다.
나이 들수록 잔소리가 싫다. 자존심 밟히는 소리가 갈대숲에 바람이 일 듯 서걱댄다.
세상에 놀기 싫어하는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그래
나도 놀고 싶거든, 그런데 아직도 고시원에서 머리를 박고 고집스럽게 한 우물을 파고 있는 제 아비의 고지식함을 닮은 아들이 버티고 있는데 언감생심 어찌 놀자는 말을 할까싶어 서운하기도 하다.
우울하고 외롭고 허전하고 막막하기도 한 오늘 같은 날에는 밤길 걷는 시간이 행복하다.
오늘도 끝 모를 거리를 무작정 걸어서 하늘 끝까지 가보자
가다가 지친 몸을 잠시 내려놓고 물가에 앉아서 어렵사리 외운 한용운 스님의 님의 침묵을 낭송하여도 보자. 그러다 보면 안개서린 강 건너에서 하얀 소복의 여인이 스르르 물을 건너와서 “나 불렀소?”하면 함께 다정하게 바위에 앉아서 ‘이제는 더 이상 헤매지 말자’며 함께 바이런의 시도 읊조려 봐야지-ㅎ
별별 시답잖은 생각과 아들걱정과 퇴직 후의 삶을 설계하는 복잡함이 얽히고설키어 밤길 여로가 무던하지 못하다.
편안함을 추구하는 일상은 삶을 황폐하게 만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잠시잠깐이라도 시간에게 빌미를 주면 쏜살같이 도망 가버린다.
아쉬움과 후회로 점철된 과거를 되짚을 때마다 술이 고프다. 소맥, 막걸리, 양주 등 종류를 따지지 않고 허전한 가슴에 불을 질러댔었다. 그러면 그 모든 근심걱정 허전함 아쉬움을 달래주는 친구처럼 술이 어여쁘게 보였다.
그러나 아침을 맞으면 신체의 구석구석이 반기를 들고 몸 주에게 대들어 가슴을 쥐어뜯고 지끈거리며 머릿속을 헤집어 놓곤 했었지.
늦잠 자는 아내를 감히 깨우지 못하고 빈속에 냉수한잔 마시고 치근거리며 달려드는 비애를 애써 떼어 놓고는 출근하는 날도 많았었지.
그런 직장생활이 무에 그리 좋다고 재취업을 하려는 건지 원!
오늘도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경안천이 끝나가는 팔당호 변에 이르렀다. 밤공기가 좋다. 수풀 우거진 호변에 여름철새 들이 제각기 모여서 수많은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내고 있다. 나만큼이나 제 살아온 얘기를 풀어 놓는 솜씨가 남다른 새들이 많이도 모였다. 목소리 큰놈은 아마도 가마우지가 아닐까 싶다. 그 놈은 온 종일 물속을 드나들며 제 주둥아리보다 훨씬 큰 손바닥만 한 붕어 잉어를 배터지게 먹고서 제 부류들과 모여서 시끌벅적 뻥을 치고 있을 것이다(난 저 두루미보다도 큰 고래를 한입에 꿀꺽했더니 포만감이 하늘을 찌르는구먼! ㅋ)
이제 돌아가야겠다.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나오는 날에도 결국은 이곳으로 발길을 내 딛는다. 이곳은 호젓하고 좋다 온갖 새들의 지저귐만 있을 뿐 아내의 잔소리도 없고 마음의 평화만 있을 뿐이다.
거리낄 것 없는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어두운 수면 위를 무심히 바라보면 언제나 그렇듯 모든 시름이 한 번에 스러져 버린다.
집으로 돌아가는 걸음이 무겁다
올적 갈 적 6만보가 넘었을 테니 어지간한 체력에는 엄두도 못 낸다.
나만의 비법이 있는데 그건 축지법을 쓰는 거다.
그 축지법이란 것이 다름 아닌 편의점 막걸리다.
요즘 세상은 살기 좋은 세상이다.
길가는 나그네 목축임 하라고 곳곳마다 편의점이 있으니 이 얼마나 고맙고 행복한 일인가?
막걸리는 취하게 마시는 비법이 따로 있다.
술이란 큰 잔으로 마시면 많은 양을 마셔야 취하고 작은 잔으로 여러 번 나누어 마셔도 취한다.
그래서 어느 주당이 ‘수저로 술 한 병을 퍼 마셨더니 어미 애비도 몰라보겠더라!’는 우스갯소리로 너스레를 떨었다
막걸리 한 병에 지친 몸을 추스르고 외로운 여정을 지속해간다
달은 높이 떠서 빛나고 어둔 산 그림자가 짙게 드리우면 별들이 어둠에서 되살아나 보석처럼 빛나서 좋다.
이제는 더 이상 헤매지 말자
아련히 흐르는 달빛 사이를!(바이런)
아름다운 세상이다
모두가 잠든 이 밤을 나 홀로 차지하고 막걸리 한 병에 한껏 취하여 끝 도 없이 펼쳐진 외길을 수월하게 걸어왔다.
징검다리 건널 때 달빛 내려앉은 물색을 바라보며 귀로에 선 내 행복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