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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흐르다    
글쓴이 : 봉혜선    23-08-30 16:58    조회 : 1,031

흐르다


봉혜선

 

중랑천 변에 나갔다. 사람보다 나무에 자연에 눈이 가는 둘레 길을 걷다 발길이 멈춘 자리다. 읽던 책을 덮어두고 나온 길이다. 노자의 수유칠덕水有七德이 떠오른다. 낮은 곳을 찾아 흐르는 겸손, 막히면 돌아갈 줄 아는 지혜, 구정물도 받아주는 포용력, 어떤 그릇에나 담기는 융통성, 바위도 뚫는 인내, 장엄한 폭포처럼 투신하는 용기, 유유히 흘러 바다를 이루는 대의大義등이다. 흐르다에 관한 성찰 중 가장 자연스럽다. 흐르다 는 물의 음성이다. 물에 한정되지 않는다.

늦여름 가지가 진 보라색 가지를 뿜어냈다. 보라색을 유난히 좋아하는 문우가 먼 길을 떠났다는 소식을 받았다. 하필 가지 밭에서 가지의 잎맥 색을 닮은 검보랏빛 진한 색에 감탄하고 있었다. 유난히 좋아한다고 생각한 건 진한 보라색 옷이 잘 어울리기 때문이라 여겼는데, 다른 일에서도 앞장서던 모습이 뒤에서도 훤하게 보인 까닭이었다.

잎은 벌레에게 몸을 내주어 숭숭 뚫린 모습을 하고 낮게, 새 잎의 그늘에 자리하고 있다. 허망한 마음이 보랏빛을 띤 구멍 뚫린 잎 같았다. 거룩하게 흐르는 자연의 얼굴의 민낯을 거기에서도 본다. 사람에게 허용된 행·불행의 총량이라는 게 있다면 그는 다 살거나 다 누리거나 다 소진하고 간 걸까? 다른 사람보다 더 바빠 보이지는 않았지만 진하게 산다는 느낌만은 유난했다. 유난히 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문우였다.

‘~노을이 지고 밤의 어스름이 산기슭을 따라 천변으로 흘러들었다. 여울은 천변의 높낮이를 따라 흐르다가 가벼운 바람에도 흔들리며 저녁 이내 속으로 흘러들고 있었다.’ 떠도는 직업을 그린 김주영 소설가는 잘가요 엄마에서 흐르다는 표현을 연속해서 썼다.

 흐르다 는 중력의 영향을 받는다는 말이다. 가장 낮은 곳으로 흐르므로 물은 모두를 담아 바다가 된다고 했다. 다랑이 윗 논에 길어다 부으면 아래로 흘러내리는 물처럼 흐르는 것이 자연스런 삶이라. 모래시계에서 좁은 통로를 통과하면 넓은 곳으로 해방되듯 바다로 가기 위해 낮은 곳에 처하기를 두려워해서는 안 되는 것이 순리이리라. 우리말 바다어느 하나 거부하지 않고 다 받는다.’ 는 의미로 해석한다.

 솟구치려는 마음을 다잡는다낮은 곳낮은 곳에 있어야 한다낮게만 엎드릴 수 있다면나아가려고만 한다면 북풍이 와도 남풍이 분다 해도 끄떡하지 않으리라거기가 내 자리이다낮은 데를 가려서 나아가려는 흐름에 거칠 것은 없으리무엇을 가리랴내 몫은 거기 어디쯤에는 있으리니.

 흐르다 는 불모와 풍요의 경계이다. 고여 있으면 썩게 마련이니 흘러야 한다. 뮤지컬 장면이 바뀌듯 인생도 휙휙 바뀌는데 나만 모르는 건 아닐까. 흐르다 보면 돌 때도 있고 솟구치거나 난짝 엎드려야 할 때도 있다. 소용돌이, 쳇바퀴 속에서, 관계의 홍수 속에서 떠다니고 있다는 말은 자연스럽지 않다는 말이 아닌가. 변검술의 마법 앞에서 어떤 카드를 쥐고 어떤 카드를 내놓을 것인가. 어떤 카드를 써야 하고 쓸 수 있는가.

흐르다 는 자연의 도이다구름이 흐르고 숲이 흐르고 한 시간이 흐르고 하루가일 년이사계절이 흐른다달은 밤새 흐르듯 움직인다별똥별도 흘러내린다너울져 흘러간다굽이굽이 구비쳐 흐른다흘러흘러 어디로 가나?

 흐른 후에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고 헤라클레이토스는 같은 강물에 발을 두 번 담글 수 없다고 했다. 변화함을 인정하고 지금 이 순간 내 발을 담근 때의 느낌과 감각을 즐겨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했다. 감격, 감흥. 이성으로 계산할 수 없는 그 뭐랄까, 순간의 미소 같은 찰나적인 것들에 진리가 있다. 오늘을 붙잡아라. 지금 이 순간을 중요하게 여기고 온전하게 향유하라는 진리가 외쳐지고 있다.

 시간은 무심한데 쏜살같은 우리만 흐르는 것임을 왜 모르는 채 살며 원망하며 기뻐도 하며 지내는 것일까. 다시 돌아올 기약 없는 일회성 길이니 물살은, 시간은, 인생은, 너와 나는, 지금은 소중하기만 하다. 이 순간 눈 깜짝할 사이에 흘러가버리는 지금을 온몸과 온 감각으로 잡아 느껴야 하리라. 이것이 역사 속을 흘러가는 자의 책임이자 의무이고 임무이리라. 진일보했다면 사그라지는 것이 흐르는 자연스런 순리이리라. 늙어가는 것도 슬퍼하지 않으리라. 잠시 맺은 인연을 감사하며 흘러가면 그만이리라. 이것이 세상을 따르는 일이다.

 ‘그때 강은,/눈앞에만 흐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비로소/내 이마 위로도 소리 없이 흐르는 것을 알았다/그것은 어느 날의 신열처럼 뜨겁게,/어둠이 강의 끝 부분을 지우면서/내가 서 있는 자리까지 번져오고 있었다. (<낙동강> 안도현). ‘구름도 흘러가고 강물도 흘러가고 바람도 흘러갑니다/생각도 흘러가고 마음도 흘러가고 시간도 흘러갑니다/좋은 하루도 흘러가고 나쁜 하루도 흘러가니 얼마나 다행인가요/흐르지 않고 멈춰만 있다면 /물처럼 삶도 썩고 말텐데, 흘러가니 얼마나 아름다운가요./아픈 일도, 힘든 일도, 슬픈 일도 흘러가니 얼마나 감사한가요/ 세월이 흐르는 게 아쉽지만,/새로운 것으로 채울 수 있으니 참 고마운 일입니다.’ ··· .

 ‘흐름, 생명이란 애초에 그런 것이다. 우리는 그침이 없는 흐름 속에서 변화하는 존재이다.’ 도처에 흐른다는 말이 흘러서 넘친다. 밤이 흐른다. 샹들리에 불빛이 흐르고 여기 모여 잠시 사는 우리도 흐른다. 작가 프란츠 카프카는 설파했다. ‘내게 글을 쓰는 이유를 묻지 마라. 그것은 강물에게 왜 흐르냐고 묻는 것과 같다. 나는 쓴다. 고로 존재한다.’ 문우여, 잘 가시오. 여기는 침묵만이 흐르고 있다.

 

<<좋은수필, 2023, 9>>

<<선수필, 제 82호, 2024, 봄호, 재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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