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자 따라하기
김 늘(김혜정)
온 나라가 꽃 대궐이 되는 4월이면 누구나 꽃구경을 나가고 싶어 한다. 코로나 상황이라도 그 욕망은 꺾지 못한다. 직장 생활로 평일에 꽃구경은 엄두도 못 냈던 나는 퇴임 후 평일에 딸과 함께 손자를 데리고 꽃 구경을 가자고 했다. 현충원의 수양벚꽃이 멋지다는 소문을 들었다. 내 차에는 카시트가 없지만 그곳은 딸네 집에서 멀지 않은 곳이어서 나는 운전을 하고 뒷자리의 손자는 엄마 무릎에 앉아 갔다. 현충원 문 앞에 도착하자 코로나로 인해 출입 통제가 되어 들어갈 수 없었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차를 돌려 가까운 곳 중앙 박물관으로 갔다.
주차장에 주차하고 운전석에서 내려 문을 닫으려는 순간 뒷자리에 있던 손자가 운전석 내 자리에 앉아 있어서 깜짝 놀랐다. 엄마 무릎에 안겨 있던 녀석이 내가 내리자마자 좁은 앞자리 의자 사이를 넘어 고꾸라지면서도 잽싸게 운전석을 차지한 것이다. 차를 좋아하는 18개월 된 손자는 아파트 창밖으로 구급차 소리만 나도 창가로 달려간다. 커다란 차를 보면 ‘우와 우와’ 하면서 감탄사를 연달아 낸다. 아마도 할머니가 내리면 내가 저곳으로 가서 운전대를 잡아보리라 목표를 세우고 다짐한 듯하다. 시동이 꺼진 상태이지만 신이 나서 운전대를 이리저리 돌려 보고 버튼을 눌러 보는 호기심 많은 녀석이 마냥 귀엽다. 어리지만 목표를 정하고 돌진하는 녀석이 기특하기도 하다. 체면 때문에, 시간 때문에 등등으로 핑계 대며 세워 놓은 목표를 달성하지 않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살아가는 어른 할머니는 부끄러움을 느낀다.
20여 년 주말농장을 해 왔던 우리 부부는 2년 전부터 구청에서 실시하는 주말농장을 해마다 했었다. 올해는 내가 퇴임하여 시간도 많으니 두 개를 신청하자고 말하며 주말농장에 대해 기대를 했었는데 3월 말이 다 되어도 아무런 연락이 없다. 구청 담당자에게 연락하니 ‘신청자가 많아 경쟁이 치열했고 선정이 안되었다’고 한다. 남편은 아쉬운 마음에 개인 주말농장이라도 해 보려고 여기저기 전화했으나 벌써 다 마감이 되었고 자리가 없다고 한다. 못내 아쉬워하는 남편과 달리 나는 올 가을에는 김장을 하지 않아도 되는 해가 되어 내심 좋기도 하였다. 그동안 가을 농사로 무, 배추 20여포기를 심어서 김장을 했다. 무 농사는 그런대로 잘 되었지만 배추는 겉 잎은 크게 잘 된 것 같았지만 속이 꽉 차지 않았다. 소금에 절이고 나면 손 바닥 만한 포기가 나올 정도이다. 그래도 무농약으로 농사지은 것이니 김장을 담그기는 했지만 그 일이 직장 생활을 하는 나에게는 큰일을 치르는 듯 힘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남편은 상추 모종 10개와 플라스틱 화분 그리고 흙을 잔뜩 들고 들어왔다. 주말 농장을 못 하니 베란다 농장이라도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흙을 나누어 화분에 담고 상추 모종을 심었다. 베란다에 화초가 많아 그러잖아도 좁아서 비집고 다니는데 상추 모종까지 바닥에 깔아 놓으니 빈 곳이 없다. 어떻게 하든 손수 농사지은 상추를 먹고 싶은 욕망을 달성해 보고 말겠다는 의지는 손자 녀석의 목표 달성 의지와 다를 것이 없다. 할아버지가 손자를 닮은 것인가 손자가 할아버지를 닮은 것인가?
모처럼 자전거를 타고 한강 변을 달렸다. 버드나무는 가지도 가늘고 잎도 길게 생겨 힘이 없어 보이는데 겨울 추위가 올 때까지 잎이 떨어지지 않고 있더니 봄 되면 제일 먼저 여린 연두색으로 공원을 색칠한다. 내 자전거는 바구니가 달린 장보기 여성용이다. 그래서 한강을 달릴 때는 모든 자전거가 나를 앞질러 간다. 상쾌한 바람 맞으며 무리하지 않고 타는 것이 내 의도이기 때문에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김포 시계탑까지가 내 목표인데 오늘은 내 앞을 롤러스케이트를 타는 사람이 앞질러 간다. 잘 타는 것이 아니고 폼도 엉성한 모양새가 초보인 듯하다. 천천히 뒤따라가다 보니 차이가 크게 났고 어느새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목표지점을 돌아 쉬지 않고 돌아오는데 아까 그 롤러스케이트 맨이 또 나를 앞질러 간다. 잘하면 따라잡을 수 있겠다 싶은 호기심이 생겼다. 페달을 힘차게 밟기 시작했다. 아마도 2배속은 되었을 것이다. 숨이 차고 힘들었지만, 허벅지에 근육이 생기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한참 후 앞에 가던 롤러스케이트 맨을 제치고 내가 앞서기 시작했다. 그래도 속도를 늦추지 않고 집으로 들어가는 길목까지 열심히 달렸다. 운동 효과도 훨씬 많았고 목표에 도달한 자전거 타기여서 더 기분이 상쾌했다. 나를 앞질러 가던 자전거들이 이렇게 달렸나 보다. 목표를 정해 놓으면 2배 이상의 노력이 필요하며 목표에 도달할 때까지 긴장을 늦추지 말고 끝까지 해 봐야 한다. 내가 손주를 닮았나, 손주가 나를 닮았나.
베란다 상추는 여린 잎 한 번 따먹고 다 녹아 버렸다. 다시 한번 심어봤지만 역시 수확하지 못하였다. 베란다 농장이 비록 실패하였지만 시도해 보았기에 많은 경험이 되었다. 내년에는 주말농장에 당첨이 되어 싱싱한 상추를 먹을 수 있기를 소망하지만 안되어도 베란다 농장 하기 공부를 더 하여 싱싱한 상추 쌈으로 맛난 점심을 먹어볼 생각이다.
두어 달 뒤 한강 변에서 자전거를 타다가 지난번 보았던 롤러스케이트 맨을 보았다. 폼도 많이 좋아졌고 발 움직임도 빨라 내가 따라잡을 목표를 포기하게 했다. 아마 그도 2배의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겠나 싶다. 이제는 나도 장보기 자전거가 아니라 스피드 낼 수 있는 MTB 자전거를 타고 쌩쌩 달리어 다른 자전거를 앞지르기하며 타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손자는 여전히 운전대 잡는 것을 좋아해서 어른 입회하에 보너스로 한 번씩 앉아 보게 한다. 시동을 켜 놓아야 핸들이 잘 움직인다는 것은 깨달은 녀석은 이제는 시동이 꺼진 상태에서 운전석에 앉게 하면 시동을 켜 달라고 신호를 준다. 그럴 땐 어른 무릎에서 운전대를 잡아보게 한다. 날로 발전하는 어린 손자를 보며 아직 말도 제대로 못 하고 쪽쪽이를 물고 있는 손자에게서도 배울 것은 있다.
어느 날 손자와 놀이터에 갔다가 옆에 있는 체육시설에서 농구 하는 형들을 보며 자신도 하고 싶다는 의사 표현을 하였다. 가지고 나간 작을 공을 주자 높이, 위로 던져 보지만 골대까지 올라가지 않는다. 그래도 잘했다고 박수를 쳐주니 땀을 뻘뻘 흘리며 더 열심히 한다. 녀석이 잠시 딴짓을 하는 동안 나도 농구를 해 보고 싶다는 호기심이 들었다. 손자의 공을 농구 골대로 던져 보았다. 육십 평생에 처음 해 보는 농구이다. 처음에 공은 높이 올라 갔지만 골인이 되지 않았다. 몇 번 해 보니 가끔씩 골인이 되었다. 재미있어서 스스로에게 환호하며 자꾸하게 되었다. 어느새 나도 땀이 나도록 하고 있었다. 그 녀석 자라는 동안 손자 따라하기를 하면 퇴직 후 내 노년의 생활에도 많은 활력이 되리라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