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그는 왜 씨앗을 뿌리는 걸까
무역센터반 윤소민
박노해 시인의 시 ‘행복은 비교를 모른다’ 가운데 이런 구절이 있다.
‘나의 행복은 비교를 모르는 것
나의 불행은 남과 비교하는 것’
시에서처럼 나의 행복을 방해하는 것도 절대적인 상황이 아니라 비교하는 마음이다. 물론 어떤 경우는 비교가 잠깐이나마 행복감을 주기도 한다. 공부 자체가 주는 만족감보다 다른 사람보다 앞선다는 우월감을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좋은 성과를 얻으면 행복하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남보다 앞섰다고 미소 지을 때 불행은 등 뒤에 마련되어 있었고, 검은 미소는 다시 비교의 그물을 던져 나를 불행감에 사로잡히게 했다.
성인이 되어서야 깨달았다. 비교는 우주에 단 하나의 존재로 나에게 집중하며 행복감을 느낄 때 슬며시 다가와 기쁨의 불씨를 꺼버리며 ‘너는 참 별 볼 일 없구나.’ 한 마디로 내 마음을 산산조각 낸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비교는 늘 나에게 들러붙으려 했고, 나는 ‘비교 거부’라는 의지의 갑옷을 입고 뿌리치고 떼어내기를 반복했다. 남이 나보다 나은 성취를 보일 때, 혹은 내가 따라잡을 수 없는 금전적 여유를 보이거나, 우리 아이들보다 더 좋은 입시 결과를 보일 때가 있다. 더 나은 남의 존재나 상황 자체가 내게 보이면 어느새 비교는 함께 들러붙는다. 남이 일부러 나를 향해 무언가를 하지 않았는데도 나는 이내 초라해지고 내 마음은 비통해진다.
하지만 그런 일들은 내 자신이 만든 것이라 그런지 대부분 시간이 지나면 나아졌다. 의지의 갑옷이 작동해서 비교를 떼어내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남과 내가 가진 것이 다르고, 남과 나의 삶이 다르며, 나의 자녀도 남의 자녀와 다른 좋은 것을 가졌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세어보고, 인정하면 된다.
그런데 K가 주는 비교는 달랐다. 나는 K를 모임에서 2년 좀 더 되게 만나고 있는데 그는 직접적인 말로 나에게 비교의 씨앗을 뿌린다. 그냥 불가피하게 들러붙는 비교와는 달리 뿌려지는 씨앗은 걷어내기도 전에 싹을 틔우고 뿌리를 내리며 자란다. 일단 마음 밭에 자리 잡은 씨앗은 잡초처럼 잘 자라고 퍼져간다.
그 모임은 선한 취지, 좋은 마음으로 삶을 나누는 자리였다. 구성원들은 기본적으로 서로에게 호의적이었고 악감정이 생길 만한 사건도 없었다. 그래서 개방적이었고 나도 별다른 방어벽을 치지 않았다. 게다가 K는 세련된 미소와 차분한 말투로 어떤 내용도 악감정 없이 말했기 때문에, 그의 말은 왠지 객관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작년까지 나는 교직을 떠나 다른 곳으로 이직하려는 준비에 한창이었다. 서류전형에 합격 되어 기뻐하다가도 면접에서 떨어져 낙심하기를 몇 차례 반복했다. 사실 나는 여러 각도에서 가능성을 타진하고 확률에 근거해서 도전하기보다는, 하고 싶은 일이고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어 보이면 우선 최선을 다해 달려본다. 제법 확고한 장애물이 예상되어도 포기하지 않고 우선은 달려가서 내가 확인하겠다는 생각이다. 그러다 실패해도 최선을 다하는 질주가 이리저리 둘러보며 달리다가 멈추는 미적지근한 태도보다 훨씬 나은 선택이라는 생각에 한 치의 의심도 없다.
이런 나의 이직 과정을 이야기하면 K는 말했다. “내 친구도 선생님같이 그 임용을 준비하는데 자꾸 떨어져요. 애초에 나이 때문에 불리한 입문인데 말이죠.”
하루는 대학생인 아들이 학교에서 어느 사업가의 초청 강연을 듣고 깊은 감동을 받았다며, 그 강연자의 삶을 통해 자신의 진로를 정비하게 된다고 했다. 아들의 그러한 생각이 행동으로도 옮겨지기를 바라는 마음이라고 모임에서 나누었더니 K가 말했다. “대학생은 뭘 듣고 생각하기보다 자신이 해보고 선택해 가는 시기죠.”
얼마 전에는 등단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오래 배운 것은 아니지만 열심히 쓰다보면 내년 2월에 등단이 가능하겠다고 작가님이 격려했다며 기대감을 보였다. 아마도 논문을 써온 경험이 있어서인 것 같다고도 했다. 가만히 듣고 있던 K는 등단에 대해서도 그다지 대단한 일이 아니라는 듯이 중얼거렸다. 어쩌면 초를 치는지 몰랐다.
젠장, 맞다. 나뿐 아니라 평범한 대부분의 사람들의 시도와 노력은 그렇게 대단하지 않고, 객관적으로 성공 가능성이 낮기도 하겠지...그럼에도 준비하는 과정에서는 ‘이루어지면 얼마나 기쁠까?’를 상상하며 기대에 부풀고 희망으로 가슴이 벅차 오른다.
K의 초치는 말을 듣고 나면 이런 내 자신이 어리석어 보이고 이전의 실패가 떠오르며 머릿속이 뒤엉켜 버리면서 자책하게 된다. 다른 사람의 눈에 노력하면 다 될 거라고 여기는 세상 물정 모르는 아이처럼 보일까 봐 걱정된다. 임용 불합격 통보를 받게 되었을 때도 기시미 이치로의 책 제목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가 떠올랐다. ‘아무것도 하지 말지. 그냥 가만히 있지. 그러면 이런 좌절도 없을 것 아니냐’면서 나를 꾸중했다. 임용 같은 도전은 하지 않기 때문에 명백한 ‘불합격’의 좌절은 없을 것 같은 누군가와 비교하면서 나를 책망한다.
사실 이렇게까지 비교의 씨앗이 풍성하게 자라는 이유는 아마도 K가 나보다 좋은 대학을 나오고, 더 좋은 직장에서 높은 연봉을 받기 때문인 듯하다. 여기까지 생각이 다 다르면 K가 미워진다. 비교는 이렇게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미움까지 불쑥 솟아오르게 한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다 내가 허용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존재 자체, 상황 자체로 내게 비교가 들러붙게 하고, K는 평온한 표정으로 비교의 씨앗을 뿌려 싹트게 하지만 결국 그것을 허용하는 것은 나 자신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