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시지프스의 형벌?
‘한의원을 가면 나을까?’
두 달 전, 딸이 학교 베드민턴 대회에 나갔다가 뛰어보지도 못하고 연습 중에 발목 부상을 입었다. 정형외과 치료를 마칠 즈음, 딸은 약속 시간에 늦어 허둥지둥 지하철 계단을 뛰어 내려가다가 다친 그 발목을 다시 삐끗했다. 많이 아프지도 않고 걷는 데 어려움도 없다고 하니, 정형외과 보다는 한의원을 가기로 했다.
침을 잘 놓는다고 소개받은 선릉역 근처 한의원, 좀 낡은 건물의 유리문을 열자 한약재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처음엔 그 향이 진하다 싶었지만 대기하고 있는 동안 익숙해지니 은은하게 느껴지고, 심지어 그 향이 피부로 들어가 건강해지는 듯한 착각까지 들었다.
한의사는 딸의 발목을 누르기도 하고, 비틀어 보기도 하고, 아프냐고 물어가면서 진찰했다. 그렇게 진단을 마친 듯한 표정이기에 이제 침을 놓겠지 생각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컴퓨터 모니터를 우리 쪽으로 돌려 보이더니 ‘견열 골절’의 엑스레이 이미지를 보여주며 딸의 발목 상태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평소에 계단의 마지막 칸을 잘 봐야 해. 보통 폰을 본다거나 다른 걸 하다가 그 마지막을 헛디디는 경우가 많거든. 발목을 삐지 않는 방법에 대한 영상이 있어. 폰 줘봐요.”
딸은 시키는 대로 한의사에게 핸드폰을 내밀었다. 그는 유튜브에서 본인 한의원 채널을 검색하고 해당 영상을 찾아 ‘구독’과 ‘좋아요’를 재빨리 누르고 진료를 이어갔다.
“자, 이제 침을 맞고 뜸도 좀 필요하겠고...치료실로 따라 오세요.”
내가 한의원을 너무 오랜만에 온 건가? 자세한 설명과 병원 홍보를 순식간에 진행하는 한의사의 방식이 낯설게 느껴졌다. 더구나 딸과 나는 오늘 처음 듣는 설명이지만, 그는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저렇게 설명과 홍보를 반복했을까? 우리가 가고 나면 다음 환자에게도 저렇게 마치 처음인 듯 설명하겠지? 그는 아마도 수없이 반복하고 있는 자신보다 이 설명을 듣는 환자가 ‘처음’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나 보다.
내가 백화점 문화센터에서 수업이 있는 날이면 아들이 가끔 지하 식품관에서 점심 한 끼를 사와 달라고 부탁한다. 그날은 ‘롤’이 먹고 싶다고 했다. ‘연어롤을 살까? 새우? 어떤 걸 사지? 딱 집어 말해주면 좋은데...’ 하며 투명한 냉장고 안에 가지런히 담긴 롤의 구성을 하나하나 살펴보고 있었다.
그런데 아까부터 내 옆에 한 아주머니가 고르지도 않고, 계산하지도 않고 그냥 서 있었다. 식품관 직원은 내가 어떤 롤로 결정할지 살피면서도 옆에 서 있는 그 아주머니에게 두세 번 미안한 듯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손님, 거스름돈을 지금 가져오고 있어요.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아, 아마도 현금을 낸 이 아주머니에게 돈을 거슬러 줘야 하는데, 요즘 현금을 잘 안 쓰니까 없어서 다른 직원이 가지러 갔구나...그런데 여기서 현금을 냈다고?’
사실 나는 오히려 일반적이지 않은 지불 방식을 택한 이 아주머니가 더 미안해야 하는 거 아닌가? 하며 나도 모르게 그녀를 쳐다봤다. 하지만 곧바로 그건 아니라는 생각으로 돌아섰다. 하지만 어쨌든 직원 입장에서는 성가시기도 할 텐데 불편한 표정 하나 없이 오히려 양해를 구하듯 말하다니...
문득 나는 투명 인간이 되어 우리 학교로 날아드는 상상을 한다. 그리고 교실 밖 복도에 서서 창문 너머 교실에 있는 나를 쳐다본다.
20여 년 전에는 아이들을 그렇게 고운 눈으로 쳐다보더니 이제는 지친 눈빛이다. 한 무리의 아이들을 1년 동안 가르쳐서 다음 학년으로 올려보냈다. 그런데 3월이 되면 다시 비슷한 성장 단계의 아이들이 오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며 한숨을 쉰다.
옆 반 선생님이 ‘똑똑’하더니 교실에 들어와 하소연을 한다.
“우리도 감정이 있는 사람이잖아요. 여러 번 얘기해도 말을 안 들어서 했던 얘기를 또 하고 또 하고, 몇 번을 반복하는데 어떻게 친절하게 말할 수 있겠어요? 우리가 AI가 될 수는 없잖아요.”
나는 ‘친절하게 반복’해야 하는 학생 지도가 마치 ‘시지프스의 형벌’같다며 동료의 하소연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들은 난생 처음 지금의 학년이 되었고, 담임으로 나를 처음 만났고, 지금 겪는 성장통도 이전에 경험한 적 없는 아픔인데 말이다. 마치 그날 한의원에서 처음 설명 들었던 나와 딸처럼...식품관에서 거스름돈을 기다리는 아주머니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