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믿는다는 것 (1)
박영희
누가 나의 삶을 그토록 섬세하게 이끌고 갈 수 있을까? 지난 70여 년을 돌아보면
하느님께서는 내가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나의 삶을 주관하시고 보살펴 주심을 느
끼게 되고 깨달을 수밖에 없다.
40여 년 전, 내 나이 31세 되던 해 "아들, 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캐치 프레이즈가 풍미하던 시대에 첫째인 딸과 둘째인 아들을 두고 있을 때, 오빠와
의 터울이 6년이나 되는 셋째 막내딸을 낳게 되었다. 막내가 첫돌이 지난 즈음,
살고 있던 독산동의 집을 전세를 주고 그 보증금으로 목동에 있는 40여 평 되는 사무실을 임차해 남편과 같이 미술학원을 운영하게 되었다. 그 사무실 벽은 합판으로 만들었지만, 연탄 아궁이도 딸린 방이 있어서 다섯 식구가 옹색하나마 살게 되었다. 단독주택에서 살다가 단칸방에서 살려니 여러 가지로 불편하고 고생스러웠다. 달리 무리하게 빚을 내어 집을 얻기도 힘든 상황이고 아이들을 돌봐 줄 사람도 없어서 일과 육아를 병행하기 위해서는 불편을 감수하고라도 견디어야 하는 형편이었다.
온종일 막내를 돌보며 미술학원 아이들을 지도하고 나면 몸이 파김치가 되어서 저녁은 라면을 끓여 먹는 것으로 때우기 일쑤였다. 그 시절에 질려서 지금도 라면을 거의 먹지 않는다.
우리가 소유했던 독산동의 집은 50평 대지에 50평의 2층 집이었으나 아래 1층에서 보면 2층이고 2층의 집과 닿아있는 외부의 길에서 보면 1층인 속칭 "푹 꺼진 집"으로 부동산경기가 좋은 때도 팔기 어려운 집이었다. 집 매매가 잘 이루어지지 않던 시기에 갑자기 집을 사겠다는 분이 있어서 시세보다 싸게 집을 매도하고, 미술학원 근처의 신축 아파트와 인접한 곳에 있는 2층 사무실을 사게 되었다.
미술학원을 운영하고 있던 건물에서 사무실을 비워달라고 하면 생업을 유지할 수 없게 되기 때문에 아파트 분양가와 같은 분양가로 집 대신 상가를 사놓게 되었다.
그런데 단독주택을 팔아서 사놓은 상가의 지하층 소유주가 자기 지분을 다 받지 못하였다고 1년 동안이나 소유권등기를 해주지 않았다. 마음을 졸이며 전전긍긍하며 지냈다. 그 사이에 남편이 전에 지니고 있던 독산동의 단독주택을 담보로 시동생 직장에 보증을 서준 일이 있는데, 이미 담보로 제공했던 단독주택은 팔리고 압류가 들어올 참이었다. 어쩔 수 없이 상가를 내 이름으로 등기를 하게 되었다. 화가 복이 된다고 상가를 매입하고 1년가량 소유권등기를 해주지 않아 전 재산을 지키게 된 것이다.
2층 사무실에서 3년 가까이 미술학원을 운영하던 즈음에 남편은 마당이 있는 곳에 유치원을 지어서 아이들이 뛰놀게 하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마침 미술학원 건물 옆에는 돌무더기가 뒹굴고 있는 공터가 있었다. 첫해에 9명의 졸업생을 배출한 미술학원은 둘이 초등학교 교사였던 관계인지 제법 어린이들도 많아졌다. 그 무렵 성당에서는 가정마다 순례하는 ‘파티마 성모님 상’을 모시고 기도를 하고 있었다. 우리도 ‘파티마 성모님 상’을 모시고 교우들이 와서 함께 기도하게 되었다. 특히 당시 총회장 내외가 꼬박 밤을 새워서 새벽 5시경까지 함께 기도해 주었다. 총회장이 남편의 견진 대부님이라 끝까지 함께 기도해 주었던 것 같았다.
철야기도에 힘입어 남편은 미술학원 바로 옆에 있는 150평 정도 되는 공터를 사겠다고 추진하였다. 나는 우리 형편에 도저히 살 수 없는 터무니없는 일이라 만류하다가 남편의 뜻을 따라 용기를 내어 부동산 중개인에게, 단독주택을 팔아서 사놓은 50 여 평 되는 상가를 담보로 5천만 원을 대출해 주면 그 땅을 사겠다고 제안하였다. 주님께서 지혜를 주신 것 같았고, 잔꾀는 여자들이 더 많은 것 같았다.
이번에는 땅값도 반 이상을 대출받아서 충당하고 약간의 사채도 있는 형편에 남편이 무조건 집을 짓겠다고 하였다.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운 일 같아서 함께 철야기도를 해주신 대부님 사모님께 의논을 드렸더니 "남자 걸음이 황소걸음이니 남편 뜻을 따르는 게 좋을 것 같다. "고 조언해 주었다.
웬걸... 공사를 시작하자마자 유치원 4학급을 운영할 수 있는 1, 2층 교실 4개와 3층에 우리가 살 집을 제외하고 1층 전면에 상가 3개, 2층과 3층의 사무실, 우리 집 옆의 한 가구가 살 수 있는 집을 전세로 임대하니 건축비 1억 원이 모두 충당되었다.
돌이 뒹굴던 쓸모없는 땅으로 여겨졌던 곳에 유치원과 상가로 지어진 3층의 건물이 들어서자 그 앞을 지나시던 분들이 "왜 내가 그 땅을 몰라보았지?" 하며 아쉬움을 토로하였다.
시동생에게 보증을 서 준 까닭에 유치원도 자연히 내 이름으로 설립하게 되었다. 그 뒤에 남편이 지병으로 선종하고 내가 설립자인 관계로 상속세를 내지 않았기 때문에 40여 년간 유치원을 유지하게 되었다. 같은 무렵에 남편이 설립자였던 유치원을 상속받은 원장님은 상속세로 5억 원을 냈다고 하였다. 우리는 상속세를 낼 여력이 없어서 유치원을 유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은 설립자가 사망하고 7년간 유치원을 운영하면 상속세가 감면되지만, 그 당시는 상속세를 내야만 했다.
삶의 위험한 고비마다 우리를 지켜주시고 우리의 지혜로는 생각하지도 못하는 방법으로 이끌어 주시는 주님의 사랑은 오묘하시고 놀랍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