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추억
김김연
친구 집에 놀러가서 치킨을 시켰다. 한 시간이 지나도 소식이 없어 전화를 하니 주문한 곳 이 경기도 하남시 풍산역 부근 치킨집이었다. 우리가 있는 곳은 일산 풍산역 주변 하늘마을이다. 치킨집 주인은 자기 동네 하늘마을이 있어 배달하려고 했는데 알고보니 일산의 하늘마을 이라서 배달할 수가 없다고 했다. 일산 치킨집에 다시 주문하여 한참 먹고 있는데 치킨 값을 보내라고 하남에서 전화가 왔다. 그쪽 것은 먹지도 않았는데 왜 돈을 내느냐고 항의를 하니 이미 만든 것은 폐기처분해야 하기 때문이란다. 돈을 보내지 않으면 경찰에 고발 한단다. 고발이란 말에 겁을 먹고 파출소에 갔다. 전말을 들은 경찰관이 치킨집과 연락하여 돈을 보내는 것으로 일단락을 지었다. 허둥댄 일을 생각하니 쓴웃음이 절로 나왔다. 닭 때문에 한바탕 곤욕을 치르고 나니 아득한 옛시절이 불현 듯 떠올랐다.
남편없이 1 년 간 시집살이를 했다. 시어머니에게 집안일을 못한다고 꾸지람을 많이 들었다. 전기도 없던 시절에 아침에 일어나서 마당을 쓸고 보리를 삶아 삼시 세끼 밥하고 청소하며 집안일을 하다보면 허기가 져 잠시 마루에 앉아 쉴라치면 젊은 것이 무엇이 힘들다고 쯧쯧 혀를 차면서 팔을 잡아끌며 일을 보챘다. 시어머니는 일머리 없다고 남의 머리에 있는 글도 배워 쓰는데 이까짓 일이 일이냐고 잔소리를 했다.
부산에서 학교를 다니던 작은집 어린 시동생들이 우리집으로 놀러왔다. 시어머니는 손님 대접 한다고 닭을 잡아 대추 생강 마늘을 넣어 백숙을 끓였다. 아홉 식구가 먹기에는 턱 없이 부족하여 내게는 국물 한 방울도 차례가 돌아오지 않았다. 그땐 나는 임신한 몸이어서 그런지 냄새만 맡아도 군침이 돌아 참기가 힘들었다. 서운하고 억울한 마음에 엉엉 울었다. 얄미운 시어머니가 나는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는지 겨우 닭 한 마리 만 잡았는지 평소에 얼마나 내가 미웠으면 치사하게 먹는 것으로 앙갚음을 할까? 내가 이집 종년인가? 남편에게 괜한 원망이 들었다. 나는 이집 구석을 떠나면 다시 발걸음을 안할거라고 마음 먹은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해 가을날 시어머니와 밭에서 야채를 다듬고 있는데 어디서 사람 살리라는 소리가 들려왔다.주위를 둘러보니 시어머니가 보이지 않았다. 소리나는 곳으로 가보니 밭 옆의 둠벙속에 시어머니가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목까지 물이 차서 위험한 상태였다. 우선 치마를 묶었던 끈을 풀어던졌다. 그러나 끈이 짧았던지 잡지 못해 한복 치마를 벗어 던지니 허둥지둥 그제서야 치마 말기를 잡고 끌려 올라왔다. 만삭의 배로 죽을 힘을 다 해야했다. 둠붕을 빠져나온 시어머니는 젖은 몸으로 아가 고맙다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큰소리치며 도도하던 평소의 기세는 어디로 가고 죽게 된 당신을 살렸다고 내가 은인이라며 거듭 거듭 고마워했다. 사납던 눈빛은 어디로 사라지고 순한 양과 같은 눈빛이 되었다. 사람 마음이 간사하다 보니 시어머니가 꼭 그랬다.
며칠 후 시어머니가 닭 한 마리를 잡았다. 푹 삶은 백숙을 나만 먹으라고 갖다 놓았다. 나를 모질게 한 것은 살림 잘 배워 사는데 힘들지 않게 하려고 한 것이니 용서 하라고 하였다 .가르치는 방법도 희한하구나 모질게 한 짓을 알기는 안 모양이네라고 생각했다. 닭고기는 목에 걸려 넘어가지 않았다. 지난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며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아들은 닭고기를 먹지 않는다. 뱃속에서 엄마의 서러움을 느낀 것일까? 임신 하여 먹고 싶은 것 먹지 못하면 아이의 눈이 작다는 말이 있다. 그래서 그런지 이 말이 곧이 들리지는 않지만 이상하게 아이 눈은 작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여태 그때의 추억은 잊히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