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강의
이 경 숙
매일 매일의 삶이 선물이다. 췌장암 시한부 선고를 받고도 감사한 사람이다. 교통사고나 심장마비가 아닌 맑은 정신으로 자신의 죽음을 준비 할 수 있다는 것이 그 이유다. 그는 미국의 카네기멜런대의 랜디 포시(Randolph F. Pausch) 교수다.
대학에서 마지막 강의 시간이었다. 150명 밖에 오지 않을 것이라고 동료교수와 50달러 내기까지 했지만 400석이 꽉 찼다. <꿈을 실현하는 방법이 아니라 삶을 살아가는 방식>이란 제목에 걸맞지 않게 처음 강의용 스크린을 메운 것은 CT촬영 사진에 10개의 종양이 표시된 그의 간이었다. 죽음을 앞두고 태연하게 삶을 말하는 그에게 청중은 매료되었다. 76분간의 강의를 찍은 동영상이 인터넷에 올랐다. 그 동영상은 유튜브 등을 통해 1000만명 이상을 감동시켰다. 바로 그의 강의주제는 <웰 다잉> 이었다.
그는 카네기멜런대에서 컴퓨터 공학박사 학위를 받고 문화 기술(CT)의 메카로 꼽히는 모교에 엔터테인먼트 기술센터(ETC)를 공동 설립해 이끌어 왔다. 월드북 백과사전을 만들고 디즈니에서 일하는 것이 꿈이었다. 그는 월드북의 가상현실 항목도 저술하고 교수가 된 후 디즈니의 만화 영화 <<알라딘>> 프로젝트에 참여해 꿈을 이루었다. .
죽음을 앞둔 포시 교수는 잘 살아가는 방식의 첫째가 정직이라 했다. 그는 자신의 아이들에게 세 마디만 남긴다면 ’Tell the truth (진실을 말 하렴)”, 그리고 세 마디를 더 한다면 “all the time (언제나)” 이라 말하고 싶다고 했다. 거짓과 사기가 판을 치는 세상에 얼마나 진부하고 평범한 말인가. 누구나 죽음을 앞둔 사람은 가장 진솔하고 자기 자신을 깨끗이 비우고 모든 것을 내려 놓게 되는 것이 아닌가. 그는 아버지로서 더 이상 아이들과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을 안타까워 하며, 사후에 자녀들이 아버지가 그들을 얼마나 사랑 했는지 알게 되면 오랜 세월이 흘러도 그 사랑을 느낄 수 있도록 추억 만들기에 시간을 할애했다.
목숨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책을 쓴 것도 몇 십년 동안 아이들에게 해줄 것을 몇 개월 만에 하는 방법으로 택한 것이다. 그는 시간을 쪼개어 아이들과 자전거 타는 놀이 시간을 지키면서 해드셋을 쓰고 휴대 전화기안에 53일간 원고를 기술했다. <<마지막 강의>> 자체가 6살과 3살의 두 아들과 2살의 딸을 위한 것이었다.
우리는 각자가 한 움큼씩 손에 쥐었던 사랑과 미움과 욕심의 모래를 삶의 바다에서 하나 하나 흘려 보내고 빈 손으로 죽음을 맞게 되지만 막상 마지막이라는 단어 앞에 서게되면 가는 자나 보내는 사람이나 마음이 초조하고 급해짐을 느낀다. 포시교수도 죽음이 목전으로 다가올 때의 그 몇 달 또는 며칠은 그가 살아온 그 많은 세월보다 더 소중하기 때문에 최선을 다 하는 것이겠지. 나도 엄마를 중환자실에 모셨을 때 얼마나 마음이 급해졌는지 모른다. 그 한정된 시간에 무엇을 해야 하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후회 없는 임종이 될까하고 많이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게 마지막 시간은 자신의 삶을 완성하는 소중한 시간이기 때문이겠지.
2007년 그의 저서 <<마지막 강의>>는 4월에 출간해 7월까지 <<뉴욕 타임스>>의 베스트 셀러목록에 600만 달러의 매출액을 기록했다. 그 글을 읽은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사람과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었고 자기 연민을 버릴 수 있으며 자살하려는 사람의 마음을 바꾸게 했다. 그 해 주요 언론과 방송 프로그램이 그를 조명했고 ‘가장 영향력 있는 100명’으로 그를 뽑았다. 췌장암으로 몇 달 밖에 못산다는 의사의 진단에 부인은 강의를 쉬고 가족과 함께 지내기를 원했지만 그는 “상처 입은 사자라도 포효하고 싶다” 며 쉼 없이, 마지막 까지 강의와 자녀들을 위한 일을 계속했다. 죽음 앞에서 최선을 다하고 후회없는 삶을 통해 농담을 하며 떠날 수 있는 그가 부럽기 까지 했다.
48세의 젊은 나이에 사랑하는 아내와 어린 삼남매를 두고 운명을 달리 한 그는 많은 사람에게 삶을, 특히 자녀와의 관계를 돌아보는데 영향을 주었다. 또 삶에 방식을 가르쳐 주었고 가족에게는 소중한 보물을 남기고 갔으니 짧지만 값지고 성공한 삶이었다고 생각한다. 이 글을 읽으며 나는 과연 어떤 삶의 방식이나 글을 이웃이나 자녀에게 남기고 갈까를 생각했다. 얼마나 오래 살았는가 보다 어떻게 살았는가를 중요하게 생각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