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영 찬가
이 경 숙
나는 수영을 좋아한다. 오로지 내가 할 수 있는 운동이 그것밖에 없다. 다리를 수술한 후로는 오래 걷는 것이 어렵다. 그래서 그렇게 좋아하던 등산도 접은 채 오직 수영만이 나의 유일한 친구가 되었다. 때로는 수영하러 나갈 때는 귀찮은 생각도 있지만, 하고 나면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다. 처음에 딸과 함께 수영을 배울 때, 딸은 헤엄을 시작하면 반대편에서 쉬고 와서 또다시 쉬면서, 쉼없이 움직이는 나에게 대단하다며 어쩔 수 없이 뒤 따라오곤 하였다. 매일 퇴근해서 옷 갈아입고 간식을 입에 물고 마지막 셔틀 버스 놓칠까 봐 뛰어가면 남편은 "수영선수 할꺼냐"고 핀잔을 주곤 하였다. 그렇게 6개월을 열심히 배웠다.
수영한 지 30여년이 지나니 물과 친하게 되고 많은 것을 배우게 되었다. 물은 너그럽고 순하며 넓은 아량으로 뚱뚱한 사람이나 홀쭉한 사람이나 차없이 대하고 내가 화가 났을 때나 기분 좋을 때도 언제나 한결같이 부드럽게 대한다. 물은 잔잔히 쉬고 있을 때 우리가 무례하게 침입해도 자신이 넘칠지언정 거부하지 않고 우리를 부드럽게 반겨주며, 때로는 우악스런 몸짓으로 거칠게 접영을 하거나 앙칼지게 자신의 표면을 할퀼 지라도 묵묵히 견디어 내며 누구에게나 모나지 않고 차별없이 엄마품처럼 우리를 안아 준다.
일본 작가 에토 마루(江本勝)는 <물은 답을 알고 있다>에서 물은 <사랑과 감사>라는 글을 보여주었을 때 비할데 없이 아름다운 육각형 결정을 나타내고, <악마>라는 글을 보여 주었을 때는 중앙의 시커먼 부분이 주변을 공격하는 듯한 형상을 보였다고 한다. 또 쇼팽의 <빗방울>을 들려주자 정말 빗방울처럼 생긴 결정이 나타나고 <이별>의 곡을 들려주자 결정들이 잘게 쪼개진 형태가 되었다고 한다. 즉 어떤 말이나 음악에 담긴 인간의 정서에 상응하는 형태를 취했다고 했다. 물이 좋은 단어와 음악을 듣고 긍정적 반응을 보인 것 처럼 우리도 긍정적인 생각과 말로 모두를 대하면 상대방 자신도 기쁘지 않을까?.
나는 평영과 접영은 허리에 무리가 되어 자주 하지 못하고 자유영과 배영을 주로 한다. 수술 후에는 기운이 없어 자꾸 허리가 구부러지는 것 같아 가족에게서 여러번 지적을 받았었다. 그 후에는 의사의 권유에 의해 배영을 주로 한다. 배영을 휘적휘적 하며 성가 34번과 248번을 혼자 흥얼거리며 감사한 마음으로 천정을 보며 물을 가른다. 나는 이 성가들을 부르며 수영을 하면 마음의 평화를 느끼며 힘들지 않아 쉬지 않고 계속 하게 된다.
"한 생을 주님 위해 바치신 어머니/ 아드님이 가신 길 함께 걸으셨네/ 어머니 마음 항상 아들에게 있고/ 예수님 계신 곳에 늘 함께 하셨네/ 십자가 지신 주님 뒤따라 가며/ 지극한 고통 중에 기도 드리셨네/주님의 뜻을 위해 슬픔을 삼키신 말로다 할 수 없는 어머니의 사랑".
나에게는 나이 들어 무리없이 할 수 있는 운동이 있다면 수영이 제격인 것 같다. 연세가 지긋한 분들도 수영장에서는 물매미처럼 민첩하게 움직여 빠르기도 젊은이 못지 않는 분들을 보며 저분들은 일찍이 물의 세계가 보여주는 인내와 너그러움을 함께 할 수 있으니 다행이다 싶었다. 나는 수영장에서만은 남못지 않게 즐길 수 있으니 그것만도 얼마나 다행인가?.
맑다 못해 파란 빛을 띤 물이 항상 철철 넘치는 수영장에는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가며 수영을 한다. 그 시달림에 지치거나 노여워 하지 않는 물의 너그러움을 배우고 싶다. 오늘도 내일도 나를 반기는 물과 친구되어 슬픔은 반으로 줄이고 기쁨은 배로 늘리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