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달부 할아버지
이 경 숙
남편은 아침마다 소년 신문을 길 건너에 사는 손자에게 배달해준다. 그것도 시간을 맞추어 7시에 신문을 전하고 돌아 와서야 아침 식사를 한다. 때론 내가 볼일이 있을 때 식사 먼저하고 신문을 가져다 줘도 좋으련만 일방 통행이다. ”어르신은 아침마다 어디를 가시냐?”고, 이웃들이 묻는다. 그이가 제일 사랑하는 손자를 위해 즐겨 하는 일이다. 지금 5학년인 그는 선생님이 영재학교를 추천하는지라 할아버지 생각엔 당신 손자가 제일 똑똑하다고 생각한다.
우리 시댁은 남아 선호의 대표적인 가정이다. 생전의 시어머니도 저희 남매를 키울 때 오직 손자에게만 치우치셨다. 두 애들과 시어머니의 간식을 준비하면 당신 것을 손자에게만 주시고, 용돈도 모아 손자 한복을 만들어 주셨다. 식탁에 놓인 맛있는 음식도 그애 앞으로 놓아 주셨다. 착하고 이해심 많은 딸애는 항상 그렇게 보아왔기 때문인지, 과일이나 다른 간식도 큰 것, 좋은 것은 오빠 것이라고 생각하여 항상 너그럽게 양보했다. 나이는 더 어린데도 생각 깊은 누나 같았다. 손님들도 딸애를 보시고 “너는 알아서 하는구나, 착하기도 하지” 하셨다.
남편도 시어머니와 꼭 같이 손자를 더 예뻐한다. 며느리가 학교에 출근할 때 손자의 아침을 준비해 놓고 가면, 남편은 반찬을 다 섞어서 참기름 한 숟갈 넣고 비벼서 먹였다. 시골에서 짜온 참기름을 듬뿍듬뿍 넣어 밥을 먹이니 손자는 몽실몽실 살이 오르고 귀여워 보였다. 아침 먹고 유치원 버스 태워 보내고 2시가 되어 유치원에서 돌아오면 며느리가 퇴근 할 때까지 할아버지와 손자는 둘도 없는 친구로 찰떡 궁합 이다.
2008년에 우리 내외가 미국으로 떠나던 날 배웅 나온 5살짜리 손자는 못내 아쉬워 하며 우리가 비행기 타러 나간 후에도 조그만 문틈으로 할아버지 할머니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 까지 보고 있었다며 주위 사람들이 안스러웠다고 했다. 집에 오면서 그는 “나는 할아버지 데리고 간 비행기 보기도 싫어” 하면서 울먹였다는 말에 가슴이 찡했다. 일주일 혹은 이 주일에 한번씩 화상 통화를 하면 전파를 타고 오는 손자의 말 한마디나 행동 하나라도 놓일세라 남편은 컴퓨터에 빨려 들어 가는양 온 신경을 다 썼다. 피아노 연주 후나 영어 웅변대회 입상 후에는 우리에게 보여주기 위해 의상을 갖추고 자랑 삼아 다시 재연을 하면 할아버지의 기쁨은 배가 된 듯 입을 다물지 못했다.
미국은 법(法)을, 유럽은 격(格)을, 한국은 정(情)을 중히 여긴다더니 정말 한국부모의 자식 사랑은 유별나지만 조부모의 손주 사랑은 맹목적인 해바라기 사랑이다. 남편은 아침에 일어나면 아침기도 후 응접실로 나가 손자 사진에 손을 얹고 기도한다. 그리고 수시로 손자가 보고 싶다며 그리워한다. 내 자식을 키울 때는 할 일이 많고 바쁜 생활을 하다 보니 자식 귀한 것도 지금 같지 않았다. 조부모가 되고 보니 중요한 것은 아들부부가 하고 우리는 손주를 예뻐만 하면 되니 무척 수월하다. 손주가 있으니 또래 아이들이 다 내 애들 같아서 관심이 쏠려 귀엽고 예쁘게만 보인다.
우리가 미국에 있을 때 손주들이 그리로 왔다. 미국의 여름학교에는 유치원 과정이 없고 재학생만 수업이 가능하므로 7살 찌리 손자는 1,2학년생들과 어우러져 열심히 뛰어 놀며 공부를 했다. 한국에서 배운 영어를 쓸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할머니, 영어로 제일 어려운 걸 물어보세요?” 하며 의기 양양해 했다. 남편은 손자의 등 하교 때 함께 데리고 다니며 그가 옆에 있는 것 만으로도 즐거워했다. 행복은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이라 했던가. 우리가 미국으로 떠난 후 태어난 2살 짜리 손녀를 그곳에서 처음 만났는데, 그들과 함께했던 4개월은 빨리도 지나갔다.
지금도 남편은 손자가 새벽미사 복사를 설때면 차로 데려가고 무엇이든 그가 원하면 들어주는 해바라기 사랑을 한다. 남편은 손자에게 일방적이니 나는 손녀의 친구가 되어야 한다. 내가 가면 “쎄쎄쎄” 하자며 마주 앉는다. 두 손을 마주 치며 “아침 바람 찬 바람에/ 울고 가는 저 기러기/ 우리 선생 계실 적에/ 엽서 한장 써주세요/ 구리 구리 가위 바위 보” 를 계속 하고 10을 먼저 이긴 사람이 노래를 시킨다. 사실은 나도 손주들이 너무 예뻐서 만나면 아는 동요는 함께 다 부른다. 기억나는 곡이 없을 때 까지, 곡명을 잘 몰라 적어서 식탁에 붙쳐놓고 부른다. 옛날 놀이도 생각 나는 대로 기억해서 함께 놀아주며 어린 시절의 아름다운 추억 쌓기를 도와준다. 먼 훗날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기를 바라며 꼭 안아준다. 손녀는 발레를 배우는데 그걸 인형에게 가르친다고 집에 있는 인형은 모두 다리를 찢는가 하면 옷을 입히고 벗기기를 반복한다.
예쁜 손주들은 파랑새 되어 우리에게 매일 매일 신선한 행복을 날아다 주어 노년의 조갈을 해소시켜주며 기쁨의 물로 촉촉히 적셔준다. 남편은 그렇게 사랑하는 손자가 장가 가는 것을 보고 죽기를 원하지만 그렇게 하려면 건강하게 100살은 살아야 하는데 그 좋아하는 주(酒)님과 별거를 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언제까지일지는 모르지만 건강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사랑의 신문배달을 계속할 수 있기를 바라면 욕심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