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냥개 노릇하는 애완견
"나의 붓은 칼이 되자. 저들을 위해서 칼이 되자. 나는 한 잡지사의 기자가 된 것보다는 한 군대의 군인으로 입영한 각오가 있어야 한다." 잡지사에 입사한지 두 주일도 안되는 기자의 포부다. 정의감에 불타오른다. 부조리를 밝혀 세상을 이롭게 하고 싶다. 그러나 현실을 모르고 있다. 현실과 거리가 있다. 이태준의 <사상의 월야(외)> (범우출판, 2004년)에 실린 단편소설 <아무 일도 없소>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이 단편은 잡지사 기자가 생계형 기자로 전락하는 장면들을 보여준다. 오늘날 정형화된 언론들의 과거이다. 생계형이라는 단어에서 보듯 먹고 살기 위한 모든 활동은 정당화 된다. 그러자면 현실을 무시해야 한다. 현실을 외면하고 기사를 써야 민생고가 해결된다. 현실을 모른 척하지 않으면 생계가 위협받는다. 이태준이 이 작품을 발표한 시기는 1931년이었다.
<아무 일도 없소>는 일제시대의 매춘이 소재다. 딸의 매춘현장을 목격한 노모는 양잿물을 먹고 자살한다. 기자는 이 비참한 현실을 쓸 수가 없다. 기사화가 안되면 아무 일도 없다는 답답함을 쓴 내용이다. <아무 일도 없소>는 "에로가 빠져서는 안될텐데..."라며 시작된다. 잡지 부수를 늘리려는 편집회의에서 나온 말이다.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 위한 관음적인 접근이다. 이것을 굳이 나쁘다고 말할 순 없다. 문제는 현실을 다루기보단 곁가지에 매달린다는 점이다. 정작 중요한 부분은 놓친다. 나라가 힘이 없어 식민지가 되었다. 그 나라에 사는 국민들은 수탈과 억압을 받는다. 힘도 없고 기술도 없어 몸을 팔아서라도 입에 풀칠하려는 여자에게 성적인 에로적 시각으로만 접근한다. 독립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등의 문제는 거론도 못한다. 자살해 죽은 노모의 시체를 건넌방에 눕혀두고 매춘을 하려는 딸의 그 절박함.
그렇게 현실을 외면한 결과는 참혹하다. 문제가 발견되면 밝혀서 개선시키기보단 덮는다. 짐짓 모른 척한다. 알면 손해를 보니까. 굳이 알려고도 않는다. 개선되지도 않을 거니 반드시 알아야 할 이유가 없다. 적당히 포장해서 진실인 듯 알려주면 그만이다. 한국 언론은 그렇게 구십여 년이란 시간의 강물을 타고 현재까지 왔다. 이태준은 이미 식민지 시대에 이런 언론의 생리를 알고 있었다. 언론의 이중성을 꿰뚫어보고 있었다. 진실추구보단 단지 먹고살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이 이 땅의 언론인 것을. 우리 언론 출생의 비밀인 셈이다. 부끄러운 모습이다. 이 기구한 현실은 약소국에 사는 국민의 운명이다. 이런 비참함을 겪지 않으려면 어찌해야 하는지에 대한 접근은 지금까지도 없다. 그저 하나마나한 사실을 뉴스라고 포장한다. 하나마나한 사실을 뉴스로 알려줘도 현실은 바뀌지 않는다.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이기 때문이다. 구십여 년의 세월동안 언론은 요령만 늘었다.
한 사회가 발전과 성장을 지속하려면 언론의 역할이 크다. 그러나 우리의 근대 역사에서 보듯이 그걸 기대하긴 힘들다. 언론이란 수많은 외부로부터의 공격을 이겨내야 한다. 또한 그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성도 알려줘야 한다. 그리고 지속가능한 발전과 원활한 여론형성도 마련해야 하는 사회적 책임이 있다. 이런 막중한 사회적 책임을 외면하고 책임도 안지다 뒤통수 맞은 게 1997년 IMF(국제통화기금)의 외환위기다. 오늘날 우리사회가 어수선하며 혼란스러운 것도 사회의 울타리 노릇해야 할 언론이 제 구실을 못한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사회를 지키는 울타리가 제구실을 못하니 무방비로 노출될 수밖에 없다. 구성원들은 먹잇감이 될 수밖에 없다. 언론의 최일선은 기자들이다. 그들은 진실추구와 사회정의를 위하기보다 다만 먹고 살기 위한 수단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태준의 <아무 일도 없소>에도 이런 부분이 나온다.
"나 그럼 신문사 하겠소. 요즘도 셋이나 있긴 하지만 그것들이 신문사요? 그런 신문사 백이 있어도 있으나마나요." 지금 우리가 이 꼴이다. 신문사가 아무리 많으면 뭣하나.
2017.08.02.밤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