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두
최재선
10여년이 다 된 구두 양 뒤 굽이 바늘구멍만큼 길을 내더니 야금야금 커지기 시작하였다. 차로 이동하는 시간이 많고 걷는 거리라야 집 현관에서 주차장, 아니면 사무실 계단 오르는 정도여서 그냥 무시하고 넘겼다. 그런데 올 3월 학교에 몸을 담으면서 경사가 쾌 큰 연구실에서 강의동, 아니면 연구실에서 예배실을 오가면서 바늘구멍만큼 뚫렸던 것이 점점 커졌다. 한 번은 강의를 하러 계단을 통해 강의실로 가는 길에 뒤에서 여학생들이 "교수님 구두 펑크났다. 쉬잇." 하는 소리를 들었다. 얼굴이 얼마나 달아올랐던지 곧바로 강의실로 가지 않고 화장실에 들러 왼쪽 구두를 벗어 뒤축을 확인했다. 손가락 세 개가 들어갈 정도로 커진 구멍을 보고 순간 부끄러움보다 내 스스로에 대해 연민의 정이 피어올랐다. 그리고 아무리 바쁘더라도 이번 주 안에 구두를 새로 사고 뒤 굽이 나간 것을 수선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퇴근하여 거실 소파에서 저녁밥이 되기를 기다리며 하나 둘 켜지기 시작한 가로등을 바라보고 있는데 집사람이 갑자기 소리쳤다. "이게 뭐야. 두부가 맛이 갔네." 유통기한이 훨씬 지난 두부를 보고 맛이 갔다는 집사람 말끝에 현관에서 거실과 주방을 한눈에 바라보고 있는 구두와 눈이 마주쳤다. 10여 년 동안 분주하고 경황없이 살아 온 내 이력서 같은 허름한 구두가 피곤하고 고단한 모습으로 날 쳐다보고 있지 않는가. 두부를 버리려는 집사람 마음을 알아차리고 녀석은 자신에게 닥칠 불길한 미래를 예언이라도 하듯 주눅이 단단하게 든 모습이었다. 나는 녀석에게 따스하게 눈길을 주며 내쫓을 일이 절대 없을 것이라는 약속을 건넸지만 녀석은 여전히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녀석에 대한 애정을 시로 나타냈다.
" 유통기한 넘긴 두부보고/ 맛이 갔다는 집사람 말처럼/ 현관의 낡은 구두 한 컬레/ 쉰 훌쩍 넘겨 어색하게 쓴 이력서 같다/ 가죽조각에 깊이 박힌 봉제선 실처럼/ 일관된 동선으로 살아 온 삶/ 가파른 언덕이나 아찔한 내리막/ 앞만 보고 정신없이 걸었는데/ 여섯 구멍이 한 개의 간진 끈으로 엮인 것처럼/ 결속된 묶음으로 살아온 삶/ 여섯 식구 가장으로/ 앞만 보고 팽팽하게 달려 왔는데/ 나의 삶이 뒤에서 꽃처럼 지고 있었다니/ 그렇구나/ 삶은 닳아진 과거를 보듬고/ 저마다의 문수로/ 기울어진 시간 터벅터벅 탁본하는 거로구나."
이 시를 통해 올 해 문학계간지 「문학에스프리」 여름호에 시 부문 신인상을 수상한 바 있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월간 한비문학」에 다른 시를 응모하여 등단하였다.(동시 동단으로 문학에스프리 당선 취소) 이 사실을 학교 홍보 담당 선생님께서 학교 소식지에 '반 고흐'가 그린 '낡은 구두 한 컬레"라는 그림과 내가 쓴 시를 소개하였다. '이미경'씨가 연재한 "명작의 비밀"에 따르면 1886년 반 고흐는 파리에 있는 벼룩시장에서 낡은 구두를 한 컬레 샀다고 한다. 그는 구두가 발에 맞지 않자 몽마르트에 있는 자기 아틀리에로 가져와서 그림을 그리는 소품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 구두는 현대미술사에서 가장 주목받는 구두가 되었다.
이 구두로 인해 철학자 하이데거와 미술사학자 메이어 샤피로가 서로 뜨겁게 논쟁을 벌였다. 하이데거는 " 어두운 낡은 구두 내부에서 힘든 작업자 모습을 볼 수 있다. 완고하고 단단하게 생긴 구두에서 여성이 터덜터덜 걷는 고집이 묻어있다. 해가 질 때처럼 밑창은 밭고랑의 외로움을 느낄 수 있다. 땅이 조용하게 부르는 소리가 구두 속에서 진동한다. 이 도구는 땅에 속한 것이며 농부 아내의 세상에서 보호받는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그런데 반 고흐가 구두를 그린 것은 8점이었다.
메이어 샤피로는 '개별 오브제로서 정물화(1968)에서 "반 고흐는 농부 아내가 신은 나막신을 그릴 때, 꽃병과 같은 테이블에 정물화처럼 깨끗하고 닳지 않은 신발을 묘사했다."고 하면서 '구두 주인은 반 고흐 자신이라고 반박하였다.'고 하였다. 구두 주인이 누구인가를 놓고 철학자와 미술사학자가 벌인 논쟁을 보면서 토론문화가 아직 낯선 우리로서는 참 할 일 없는 사람처럼 여길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구두 주인이 누구든 낡은 구두 한 컬레는 고된 삶을 살아온 사람을 보여주는 생활의 소도구라 할 수 있다. 평범한 사람이든 예술가이든......
나는 내 자신이 처한 특별한 환경으로 인해 여섯 식구 가장 역할 뿐만 아니라 때로는 주부, 가르치는 선생, 기타 일에 이르기 까지 여러 일을 함께 해야 하기 때문에 늘 분주하고 경황이 없는 편이다. 그런데 올 해 학교에 몸을 담으면서 유년시절부터 꿈꾸고 그려온 시인이라는 딱지를 겨우 달았다. 그동안 글을 쓰면 그냥 버리기 일쑤였는데 시에 집중하고 몰두하자 봇물이 터지듯 시샘이 솟아올랐다. 현관에 낡은 내 구두와 반 고흐가 벼룩시장에서 산 낡은 구두가 지닌 의미는 예술적 차원에서 감히 비교할 수 없는 대상이다. 그러나 내 구두는 내 삶이 고스란히 스며있는 내 삶의 애정이 깃든 이력서인 데 반해 반 고흐의 구두는 다른 사람 삶이 배어있는 것이다. 그렇다하더라도 반 고흐가 미술사에 남긴 커다란 족적을 등불삼아 이제 갓 입문한 시인의 길, 창작의 길을 구두가 닳고 해어지고 찢어질 때까지 곁눈질 하지 않고 매진하려고 한다.
" 내 명함엔/ 이름과 연락처는 있어도/ 직업이 없다/ 여섯 식구 돌보는 가장/ 시장보고 청소하고/ 설거지하다 습진 걸린 주부/ 모국어를 욕되게 하는/ 어설프고 설익은 풋시인/ 학생들에게 돈 되지 않는/ 글 쓰는 지식 파는 선생/ 이 땅에서 숨 쉬는 동안/ 맑고 환한 언어 마주하고/ 단비 같은 시 쓰면서/ 내 이름 앞에 시인이라고/ 당당하게 불 밝히고 싶다/ 시인 아무개집이라고/ 문패 깨끗이 내걸고 싶다/ 세상에 시인이란 명함/ 떳떳하게 내밀고 살다/ 시인이란 허물 뒤집어 쓴 채/ 시에 파묻혀 죽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