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acheZone
아이디    
비밀번호 
Home >  기타그룹 >  수필공모
  명의의 손    
글쓴이 : 박관석    15-03-11 10:52    조회 : 5,498
 
명의(名醫)의 손
 
 
 장대처럼 내리는 빗줄기가 한낮의 더위를 식혀주던 어느 여름날이었다. 온 몸이 비에 젖어 추레한 몰골로, 할머니 한 분이 지팡이를 짚으며, 휘적휘적 응급실로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허리가 땅에 닿을 정도로 굽은 채, 지팡이에 의지한 몸은, 너무나 야위어 바람에도 쉽게 날아갈 정도였다. 백발이 성성하고, 듬성듬성 빠진 머리카락에 주름이 깊게 드리워진 얼굴로 보아, 족히 여든은 되어 보였다. 응급실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이리저리 둘러보던 할머니의 눈이 나와 마주쳤다. 순간, 할머니 입에서는 신음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봐 의사양반, 무릎이 많이 아파. 주사하고 약 좀 줘
할머니, 언제부터 무릎이 아프셨어요?”
그냥 매일 아파. 에구, 이놈의 비가 오는 날이면 더 아프고…….”
다리를 다치거나 수술한 적은 없으시고요?”
없어. 그냥 매일 타 먹던 약이나 줘
 
 앞에 놓인 차트를 보던 나는, 할머니가 만성퇴행성 관절염으로 일주일에도 서너 차례, 주사를 맞고 약을 타 가셨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전 처방대로 약을 주려던 내 손이 차트 위에서 멈췄다. 장대비를 뚫고, 그것도 고령의 할머니가 응급실로 왔다는 것은, 전보다 병세가 많이 악화되었거나, 합병증이 생겼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기 때문이었다.
할머니, 무릎 좀 보게 저기 침대위에 누워보세요
에구, 힘들다! 먹던 대로 약이나 주고, 주사나 한방 놔주면 될 걸......”
그래도 아픈 곳을 진찰해 봐야 하니 얼른 침대에 누워보세요.”
몇 번인가의 내 부탁에 마지못한 듯, 할머니는 아픈 다리를 이끌고 간신히 침대위로 올라가셨다. 당시 인턴이었던 나는 곁눈질해서 본 것과 책에서 배웠던 기억을 되살려, 할머니의 무릎에 무슨 문제라도 있을까? 열심히 이리저리 살피면서, 초자의사의 티를 내고 있었다.
 
 한참동안 당신의 무릎을 보고 있던 내가 신기했는지, 할머니가 넌지시 질문을 던져 왔다.
의사선생. 그래 내 다리에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거야?”
아니요! 뭐 딱히 문제가 생긴 것은 없는 것 같네요
그런데 왜 아까부터 그리 자세히 보는 거야? 걱정스럽게
이런 궂은 날씨에 응급실로 오신 것이, 혹시 병이 더 악화되었거나 다른 병이라도 생긴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어서요.”
아이고 저런, 경황이 없어 내가 미처 말을 못했나 보네. 실은 어제 먹던 약이 다 떨어졌는데, 마침 어디를 다녀오느라 이제 온 것인데. 하루라도 약을 안 먹으면 당체 아파서 잠을 잘 수가 있어야지.........”
그제야 할머니는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미안한 듯 빙그레 웃으셨다. 할머니의 말씀에 안도의 숨을 내쉬며 다시 책상으로 옮겨간 나는, 지난번 차트에 기록된 대로 약 처방을 내렸다.
 
 다음날 아침은 언제 비가 왔었냐는 듯 맑게 개어 있었고, 여느 때와 다름없이 응급실은, 밀려드는 환자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환자에 치여 점심도 거른 채 허덕이고 있던 내게, 외래로부터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안녕하세요. 여기는 정형외과 과장님 방인데요, 과장님께서 선생님을 찾으세요. 빨리 외래로 와주셔야 할 것 같은데요.........”
과장님이요? 과장님이 왜 저를 찾으시는데요?”
글쎄요, 저도 이유는 잘 모르겠는데, 빨리 와주셔야 할 것 같아요!”
외래 간호사의 뜬금없는 전화에 혹시 내가 어제 응급실에서 진료한 환자에게 무슨 문제라도 생긴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이 파도처럼 밀려들고 있었다. 대체로 외래에서 응급실 인턴을 찾는 이유는, 전날 환자를 오진(誤診)했거나, 잘못된 설명과 처방으로 환자로부터 항의가 들어오는 경우였기 때문이다.
 
 외래로 가는 동안 가슴은 도둑질하다 들킨 사람처럼 방망이질 하고 있었고, 복도를 걸어가는 시간이 무척 길게만 느껴졌다. 정형외과 과장님 방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왠지 낮 익은 할머니가 다른 한 분의 할머니와 함께 서 계셨고, 과장님이 무엇인가 열심히 할머니께 설명하고 있었다.
! 어제 응급실에서 본 할머니 아닌가?’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던 순간, 내 귀에는 좀 의아한 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어제대로 처방 내려 달라는데 왜 안 된다는 거야?”
할머니, 이게 어제 처방 그대로 한 건데요. 도대체 뭐가 다르다는 건지. 참내…….~”
글쎄 약이 다르대도, 내가 늙었다고 그 정도도 모를까봐. 얼른 어제 약 대로 처방해 주고 그때 진찰했던 의사가 어디 있는지만 알려줘요. 내가 이렇게 환자도 한 명 더 데리고 왔구먼........”
답답한 듯 한숨을 내쉬던 과장님의 눈에 그제야 내가 들어왔는지, 나를 향해 따지듯 물어 오신다.
아니 박 선생! 도대체 어제 무슨 약을 처방해 주었기에 할머니가 이렇게 난리신가? 그리고 약을 바꿔줬으면, 차트에 제대로 기록해 놨어야지……. 나를 이렇게 난처하게 만들면 어쩌나?”
! 아닌데........ 약은 과장님이 처방하신대로 똑같이 드렸는데요!”
처방이 뭐가 달랐으니까 할머니가 이렇게 따지러 오신 거 아닌가? 에이! 나도 모르겠으니 자네가 알아서 처리하게
그때 내 얼굴을 자세히 보시던 할머니가, 갑자기 덥석 내 손을 잡는 것이 아닌가? 할머니는 기쁨에 넘쳐 고함에 가까운 소리를 지르셨다.
아이고, 그래 이 양반이네. 이 양반!”
“................”
글쎄, 자네가 어제 놔준 주사를 맞고 아픈 다리가 정말 말끔히 나았잖아. 모처럼 만에 안 아프니 잠도 잘 잤고…….”
할머니, 그런데 왜 또 병원에 오셨어요?”
! 내가 좋아졌다고 하니까, 이 할멈도 자네에게 꼭 한번 치료 받아 보고 싶다고 해서, 내가 이렇게 데리고 왔지. 잘 좀 봐줘
황당해 하는 내 모습을 보면서 활짝 웃으시는 할머니는, 기어코 응급실로 친구 분을 모시고 가서 내 진찰을 받고 약을 받아가셨다.
 
 며칠 후 다시 응급실을 찾은 할머니께 들은 자초지종은 이랬다. 원래 만성퇴행성 관절염을 앓고 계시던 터라, 병원에 와도 매일 똑같은 소리에 약만 주고 의사들이 아픈 곳을 쳐다보지도 않더란다. 아픈 부위를 보여주기 위해 옷을 걷으려고 하면, 벌써 처방을 내리고 다음 환자를 부르는 통에, 제대로 이야기 한 번 못해보고 진료실을 나가기 일쑤였고. 그런데 그 날은, 내가 너무 자상하게 당신의 다리를 봐 준 덕분인지는 몰라도, 아픈 다리가 거짓말처럼 좋아졌다는 것이다.
 
 돌이켜 보면, 당시 할머니를 인턴인 내가 치료를 더 잘했을 리 만무였을 터이고, 약 처방도 다를 게 없는 마당에 할머니의 증상이 좋아진 것은, 아마 우연의 일치였을 것이다. 혼자 사시던 할머니는, 자신에게 관심을 갖고, 말 한마디라도 자세히 들어주고 건넬 수 있었던 사람의 정이 더 그리웠던 것은 아니었을까?
 
처음 의사가 되어 진료를 할 때, 스승님이 하셨던 말씀이 불현 듯 기억에 떠오른다.
환자를 진료 할 때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그 사람의 말을 자세히 듣는 것이라네, 그래야 제대로 된 진단을 할 수 있게 되지. 더욱이 환자의 말을 잘 듣는 것만으로도, 이미 치료는 시작되는 것이고!”
의사가 된지 20년이 넘어서도, 그 말씀이 새삼 마음에 와 닿는다. 내가 경험한 환자들은 특정 질병으로 병원을 찾을 때도 있었지만, 종종 마음속에 내재된 응어리가 질병으로 나타나거나, 그것이 병을 악화시켜 나에게 오기도 했다. 그것을 풀어내지 않고 치료를 시작하면 내재된 질병을 제대로 발견하지 못하게 되어, 간혹 오진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환자의 말을 자세히 들어주면, 그들 마음속에 응어리진 것이 풀려나가고, 질병 본연의 모습이 드러나면서 제대로 된 치료가 시작되었을 뿐 아니라, 그들의 말을 경청하는 것만으로도 환자들의 질병이 호전되는 것을 경험한 적도 있었으니 말이다.
 
 그 후 파견근무 하는 2개월 동안 할머니는 꼬박 응급실로만 진료를 받고 가셨고, 동네 할머니와 할아버지 몇 분을 더 모시고 온 덕에 그 동네에서는 내가 명의(名醫)로 통하였으니, 지금도 거의 못 들어보는 명의 소리를 듣던 그때가 그리울 따름이다.

강수화   15-03-11 14:43
    
제가 삼 십 여년을 프로레탈리아로 살다가(남편은 ‘프로박테리아’라고 합니다만)
결혼을 하면서 미국으로 갈 일이 있었지요.  그곳에서 병원에 가게 되었습니다.
예약시간에 맞춰 병실로 들어서자 의사가 기다리고 있었던 듯 반갑게 맞았습니다.
그러면서 가장 좋은 위치의 의자로 안내하더군요.
저는 앉아서, 닥터는 서서 진료를 시작했습니다.
 하늘처럼(?) 높은 분한데 이런 대우를 받아도 되는지,
 한국에서의 의사들 권위와 위엄에 익히 길들여져 있던 저로선 앉아있는 내내 황송한 마음 금할 길 없어
오히려 불편했던 기억이 납니다.
(물론 요즘은 우리 한국병원도 많이 달라져 선진국 못지 않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자신의 생명을 관장하는 의사 앞에 자연 주눅 들기 마련인데 따뜻하게 눈을 맞추어 준다면
처방약에 앞서 약손의 진가가 배가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 나라 환자를 대표하여 진정한 의술을 펴시는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박관석   15-03-12 12:13
    
항상 부족함을 느끼는 제게, 너무 과분한 말씀이 아닌가 합니다.

한국의 의료현실도 점점 바뀌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제 의사들도 권의의 가운을 벗고, 좀더 친숙하고 따뜻한 마음으로
환자분들께 다가가려는 시도가 늘어가고 있습니다.
첫술에 배부른 법은 없듯이, 시간이 많이 걸리겠지요.

그리고 물론 의사자체의 문제도 있지만,
단적으로 미국과 비교할수 없는 것은
너무 현실적인 차이가 크기 때문입니다.
둘 사이에 장단점도 분명히 존재하고요....

가장 큰것이 경제적인 것과 시간적인 제약일 겁니다.
최소 2-3분에 한분의 환자를 진료해야 하는 한국,
그 사이에 오진없이, 최상의 서비스까지 겸비하기는
현실적으로 문제가 따르는 것이 사실입니다.
변명같이 들리실지는 모르지만...
자세한 것을 쓰기에는 공간이 부족하기에
차츰 개선해 가야할 문제들을 더 말씀드리기로 하겠습니다
수필을 쓰는 공간에 이런 이야기를 자꾸 하면
혹시 글을 읽는 분이나 선생님들께서 꾸중을 하시지는 않을지..
걱정이 되긴 하지만요....
 
   

박관석 님의 작품목록입니다.
전체게시물 6
번호 작  품  목  록 작가명 날짜 조회
공지 ★★수필 응모하는 분들은 꼭 읽어보세요 (6) 웹지기 05-15 80264
6 포도나무처럼 박관석 07-03 4220
5 다시 찾아온 봄 박관석 07-03 3952
4 그 아픔까지 사랑 한 거야 박관석 07-02 4449
3 연필 (2) 박관석 03-13 5609
2 명의의 손 (2) 박관석 03-11 5499
1 호랑이와 곶감 (2) 박관석 03-08 64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