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아픔까지 사랑 한 거야
거센 바람이 나를 향해 불어온다. 마치 투우사에게 달려오는 성난 황소를 닮았다. 이내 나는 바람에게서 등을 돌렸다. 더 이상 바람은 나를 힘들게 하지 않는다. 내 몸을 바람에 실어본다. 바람은 어느새 내 편이 되어 있었다.
겨울의 시작을 알리 듯 싸락눈이 내리던 8년 전 어느 날이었다. 갑작스레 동생으로부터 걸려온 전화, 마침 조카가 태어날 때가 가까웠었기에, 좋은 소식이 아닐까? 하는 기대감으로 수화기를 들었다. 하지만 수화기 너머 동생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형. 아이가 좋지 않아요. 대학병원으로 옮기라는데, 어떻게 해야 돼요?”
“뭐라고, 도대체 무슨 일인데? 자세히, 자세히 좀 말해봐!”
놀란 내 목소리는 고함에 가까웠다. 동생의 울음 섞인 설명, 태어난 조카가 얼마간 숨을 쉬지 않았다고 했다. 의사의 큰 병원으로 가라는 말에 내 얼굴 밖에 떠오르지 않았단다. 부리나케 이곳저곳에 연락을 넣었다. 다행히 한 곳에 신생아 중환자실이 남아있었다. 급박했던 순간, 지금도 눈앞에 선명한 칠흑같이 어둡고 길었던 그날 밤은, 내 기억 속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긴 채 흘러가고 있었다.
새벽녘, 산등성이 너머론 충혈 된 눈보다 더 붉은 태양이 긴 밤의 어둠을 몰아내고 있었지만, 내 마음속에 드리워진 검은 그림자까지 걷어내지는 못했다. 싸락눈은 밤새 함박눈으로 변해 온 천지를 덮어버렸다. 마음이 조급해 졌다. 조카가 입원한 병원으로 가는 길, 눈 때문에 기어가는 차들이 내 마음속에 초조함을 함박눈보다 높게 쌓아 놓아버렸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찾은 동생으로부터 그 동안의 자초지종을 들을 수 있었다. 일주일전 산전검사(産前檢査)에서도 산모나 태아에게 아무 이상 없이 없었단다. 충분히 자연분만도 가능하다는 얘기를 들었다고도 했다. 하지만 난산(難産)이었다. 7~8시간의 진통에도 초산이라 그런 것이라고 너무 걱정하지 말고 기다리라고 했단다. 태어나기 30분전 갑자기 태아의 심장박동수가 떨어지기 시작했고, 잠시 후 아이는 무사히 나왔지만, 얼마간 입술이 파랗게 될 정도로 숨을 쉬지 못했단다. 소아과가 같이 있었던 제법 큰 산부인과 전문병원이었지만, 조카가 문제가 있을 때 소아과 담당의는 없었다고 했다. 오직 당직의사만이 아이를 데리고 대학병원으로 왔고,
진료실에서 만난 대학병원의 담당교수는 절망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지금으로서는 아기의 예후에 대해 어떤 것도 정확히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심한 뇌손상을 입었다는 것 외에는...”
아이는 인공호흡기에 의지한 채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작은 생명이 죽음과 사투를 벌이고 있는 장면은, 나에게 분노를 일으키기에 충분한 동기를 주고 있었다. 나는 흥분하고 말았다. 동생에게 모든 의료 기록을 복사하라고 한 후, 직접 산부인과 의사에게 전화를 했다.
“어쩔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저희로서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최선을 다했다고? 소아과 의사도 없었고, 상태가 안 좋으면 제왕절개를 권유했어야 되는 것 아닌가? 란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다. 며칠 후 받아 본 의료기록사본에는 너무도 미비한 부분이 많았다. 내 마음속에 오기가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아니 법적인 문제는 그렇다 치더라도 잘못했다는 사과만큼은 받아내고 싶었다.
그해 겨울은 유난히 춥고 혹독했다. 거실에 들여놓은 화초도 밤의 추위를 견디기 어려웠었나 보다. 하나둘씩 시들어 가는 화초들이 내 마음을 대신해 주는 듯 했다. 한해가 저물어 갈 무렵의 어느 날 동생의 연락이 있었다.
“형, 너무 괴로워요! 아이가 이렇게 된 것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사실이잖아요? 이제 그만하고 싶어요. 누굴 미워하는 분노의 감정으로는 더 이상 버티기 힘들 것 같아요.”
날개가 꺾여 날지 못하는 새의 가녀린 신음소리만이 내 귓전을 맴돌고 있었다. 힘을 내라는 말에도, 조금 더 버텨보자는 내 말에도 동생의 의지는 확고했다. 그 후 동생은 모든 법정 소송을 포기했다.
몇 달 후 상담을 위해 다시 찾은 대학병원 담당교수의 얼굴은 밝지 않았다.
“아이의 생명에는 지장이 없겠지만, 뇌에 너무 많은 손상을 입었습니다. 어쩌면 아이가 앞으로 걷거나 말하는 것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청천벽력 같다는 말이 이보다 더 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부모나 그러했겠지만 동생은 포기하지 않았다. 차를 타고 1시간 이상을 다녀야 하는 아이의 물리치료와 재활치료를 하루도 거르지 않았고, 하루에도 2~3 군데의 병원의 치료를 마다않고 해내고 있었다.
순환하는 계절의 변화만이 내게 시간이 흐른다는 것을 느끼게 해 주고 있었다. 간간히 들려오는 조카의 소식은 완전히 절망적이지는 않았다. 어느 순간 엄마와 아빠를 알아보더니, 많이 느리긴 해도 조금씩 일어나 앉아 있는 시간이 길어진다고 했다. 얼마 후엔 물건을 붙잡기는 해도 일어설 수도 있다고 했다. 소식을 전하는 동안 동생은 웃고 있었다.
3년 전 가을을 화려하게 수놓았던 단풍도 하나둘씩 시간의 무게에 못 이겨 떨어져 나가던 추석 전날이었다. 우리 형제들은 부모님 댁에 모였다. 조카를 데리고 온 동생의 첫마디는 우리가족에게 한가위의 풍성함 이상을 안겨주었다. 아이가 며칠 전부터 말을 하기 시작한다는 것이었다. 엄마, 아빠는 물론 간단한 말까지도, 그리고 이젠 제법 폼이 나게 걷기 시작했고, 달리는 것도 가능할 정도였다. 그 동안의 동생 부부의 노력이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저녁을 먹은 후, 옥상에 만들어 놓은 평상위에 나란히 동생과 누웠다. 잠시의 정적을 깨고 동생이 나직이 혼잣말처럼 말을 꺼냈다.
“형! 몇 년 전 내가 전화했던 날, 재판을 포기하겠다고 하던 그날 기억나지? 정말 그 당시는 내가 뭘 해야 할지를 도저히 알 수가 없었어. 마치 거미줄이 내 몸을 옴짝달싹 못하게 옭아매고 있는 느낌이었지. 앞날에 대한 두려움도 컸고...”
어느덧 눈가가 촉촉해 지는가 싶던 동생이 한숨을 내쉬며 그때의 기억을 다시 떠올렸다. 그날 막막하기만 했던 동생이 아들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는데, 그때까지 아무 표정도 없기만 하던 조카가 빙긋이 자기를 보고 웃고 있더란다. 그리고 잠시 후 입을 오물거리던 아들이 무엇인가를 말하는 듯 보였고, 그때 동생은 분명히 그 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아빠 힘내세요. 사랑해요”
조카는 올해 특수학교에 들어갔습니다. 처음 진찰했던 대학병원 교수님도 조카를 보면 기적이 일어났다고 말합니다. 지금도 가끔씩은 경련으로 응급실을 다니며, 아직 말하는 것이 서툴고, 걸음걸이가 부자연스러울지라도 언젠가는 조카가 자신의 아픔을 이겨내고 굳건히 자랄 것이라 믿습니다. 힘든 시간을 지나고 있을 조카와 동생부부를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