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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도나무처럼    
글쓴이 : 박관석    15-07-03 10:56    조회 : 4,220
         
                                    포도나무처럼
 
 
 한여름 푸르게 우거진 플라타너스 길을 걸어가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하늘로 쭉 뻗은 나뭇가지의 푸른 잎들을 볼 때면, 시원함을 넘어 젊음의 생기마저 느끼곤 합니다. 하지만 혹시, 가로수 길을 조금 벗어난 한적한 시골길에, 작은 포도밭을 지나쳐 보신적은 있으신지요? 그곳에서 우리는 플라타너스와는 좀 다른 모습의 포도나무를 만날 수 있습니다.
가녀린 가지가 구불구불 간신히 올라간 끝에, 주렁주렁 달린 포도로 무거운 몸을, 다른 것에 기대지 않고는 도저히 서 있을 수조차 없어 보이는 포도나무들이, 뜨겁고 힘든 여름을 버텨 내고 있는 모습을.
 
어느덧 시간이 흘러, 푸른 나뭇잎들이 늦가을 찬바람에 길거리를 뒹굴 때면, 우리의 가슴 한편은 옷 사이를 파고드는 찬 기운으로 시려 오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따뜻한 난로가 놓여 있는 작은 찻집에 앉아, 향긋한 커피 향에 녹아들거나. 별이 반짝이는 까만 밤하늘을 보며, 포도향이 진한 와인 한 잔에 옛 추억을 떠올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한 여름 뜨거웠던 연인과의 사랑 이야기나, 시원한 가로수 길을 다정히 걸었던 좋은 사람과의 기억을.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우리의 시렸던 가슴이 따뜻해져 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겁니다. 그 동안 아마, 탁자 위나 손에 들려있던 크리스털 잔속의 와인은, 점점 줄어들고 있겠지요.
 
진료를 하다보면, 온통 머리가 하얗게 세고 얼굴엔 주름이 가득한 채, 허리는 굽을 대로 굽어 지팡이에 간신히 의지해, 힘겹게 발걸음을 옮기는 노인 분들을 자주 만나게 됩니다. 또 어떤 때는, 침대에 누워 다른 사람의 손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런 분들까지도.........
그러다보니 나이가 먹어 늙어가는 것이 두려움으로 다가왔습니다. 한편으론 우울해지기까지도 했습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늙어 병들어간다는 것은 사람이라면 피할 수는 없는 현실이겠지요.
그즈음 길을 걷다가, 플라타너스 가로수길이 끝나가는 지점에, 한여름의 포도밭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무엇엔 가에 지탱하지 않고서는, 가지에 매달려 있는 무거운 포도송이를 도저히 버텨내지 못할 것 같은, 아니 어쩌면 혼자의 몸조차 바로 세우지도 못할 것 같은 포도나무들의 모습이.
 
가을이 지나 온 세상이 흰 눈에 덮이고, 매서운 찬바람이 불어오는 계절이 오면, 싱싱하고 무성했던 플라타너스는 그 화려했던 젊은 여름날의 흔적을 모두 잃고 추위에 떨고 있겠지요! 하지만 포도나무는 자신이 모든 것을 잃은 후에 남긴 향 깊은 와인으로, 겨울의 깊이를 더해 주고 따스한 온기로 봄을 기다릴 수 있는 힘을 주고 있다는 것을 문득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제야 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던, 나이 먹고 늙는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우울함이 희석되어 가고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비록 늙어 무엇엔 가에 기대거나, 누군가의 도움을 받지 않고는 살아가기 어렵다할지라도, 포도나무처럼 진하고 깊은 향을 지닌 와인으로 남아, 다른 이들에게 즐거웠던 기억을 떠올릴 수 있게 하고 따스한 온기를 전해 줄 수만 있다면, 뜨거운 여름을 힘겹게 버텨낸 그들처럼 노년을 버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
 
그리고 먼 훗날 어느 순간 세상을 떠날 날이 가까워지면, 포도나무 그늘에 서서 이렇게 말해보고 싶습니다.
 
"자네! 그 동안 고생 많이 했네. 그래도 살아 볼만한 세상 아니었나? 이제 편히 쉬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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