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무가내의 시간
‘사람이 시간을 때우는 줄 알았는데, 시간이 사람을 때운다. . .’
영화 ‘더 레이디 인 더 밴’의 끝부분 어디쯤에선가 무방비로 부딪친 대사이다. 우연히 발생한 교통사고에서 자신의 과실로 인명사고가 난 것으로 오인하여 인생으로부터 영원히 도망치듯 숨어 살았던 한 여자의 생애가 그려진다. 그녀의 우연한 관찰자가 되었던 영화 속 주인공이 그녀의 삶 마지막 부분에서 쓸쓸히 뱉은 말이었다. 그즈음 노환으로 의식 없이 중환자실에 누워 계셨던 어머니의 회복을 기다리며 하염없이 시간 속을 헤매던 때이라 느닷없이 다가 온 그 대사는 나를 소스라치게 후려쳤다. 내 마음이 거의 하루 종일 머무르던 중환자실을 이보다 더 극적으로 묘사해 주는 표현이 있을까! 소생 가능성으로부터 무정하게 멀어져 가는 환자 옆에서 가족들이 가늠할 수 없는 불안으로 지쳐 갈 때, 중환자실은 이제 정확히 시간이 사람을 때우는 공간이다.
중환자실을 에워싸고 반경 100여 미터 이내 공기처럼 떠도는 익숙한 풍경들.
병원 현관 입구를 지나면서부터 벌써 들려온다.
“아니, 글쎄 아직 사람은 다~아 알아본대!”
“일반실로는 언제 갈 수 있대요?”
“주치의는 도대체 언제 코빼기를 볼 수 있다나요?”
“중간 정산이 벌써 700이 나왔대요...” (한숨)
환자 가족들의 대화는 그 반복주제에도 불구하고 결코 지루할 수도, 뒤로 물러설 수도 없는 절박 그 자체이다.
병실 안은 상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저마다의 불행으로 가득하다. 뇌졸중으로 쓰러진 어머니, 농약을 마시고 온 시어머니 (아직 깨어나시질 못해 사고인지 고의인지조차 가족들은 모르는 채로), 네 번째 뇌경색 수술을 받은 아내, 사고로 머리를 다쳐 의식 없이 모로 누워 있는 서너 살 어린 아이 등.
지켜보는 이들이 더욱 고통스런 시련에 허덕이는 곳.
크나큰 슬픔 기나긴 슬픔 버거운 슬픔 망막한 슬픔 버려진 슬픔... 슬픔의 온갖 실체가 휘감고 있는 곳.
온 몸으로 불행에 맞설 때 말은 만들어 지지 않는다. 입 밖으로 저절로 터져 나올 뿐이다.
“내 말 들려?”,
“누군지 알겠어? 나, 나?”,
“자장면 먹고 싶댔지? 눈을 떠야 먹지?”
“어여 집에 가야지?”
“당신 두고 우째 돌아서나?”
“끄덕이기라도 해야 당신 또 보러 오지”
지상에서의 마지막 만남이 될 수도 있는 시공간이어서 면회시간 종료를 알리는 경비원의 낮은 한마디 말조차도 조심스러운 곳.
눈시울을 닦으며 병실을 나오는 가족, 문병객들이 서로의 회복 진척을 물으며 기약 없이 헤어지고, 예정 없이 스치듯 다시 또 만나 동병상련의 이웃이 되는 곳.
어느 병원 수술실과 중환자실 앞에는 수녀님들이 상주 대기하고 있어서 누구나 희망하면 함께 기도를 드려 준다는 뉴스 보도를 본 적이 있다. 기도를 청하는 가족들의 절실한 마음에 종교의 이름은 필요하지 않으리라.
모두 알듯 죽음은 모든 지상의 생명으로부터 차단된 영역이다. 죽음이 절대자 하나님의 뜻임을 우리 모두 순종하나, 막상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앞에서는 하나님은 막무가내로 다가온다. 가족의 소생을 간절히 바라면서 기도는 겸허한 차분함을 잃고 하나님의 가혹한 침묵 앞에 또 하나 막무가내가 된다. 소중한 이를 떠나보낼 준비가 아직 되지 않았음이 죽음을 면할 수 있는 권리이며, 깨뜨릴 수 없는 무죄증명이나 되듯 신께 막무가내 간구한다. 사랑하는 이를 위해 기도하는 그 순간 나의 살아있음 자체가 신 앞에 하나의 억지이다. <자신의> 죽음이 닥치면 소중한 이들을 ‘떠나 갈 준비가 아직 안되었다’고 표현이 바뀌면서 이 절실한 억지는 두 배, 세 배 더 커지게 될까?
기도의 순 우리말은 ‘빔’이라 한다. 인간의 유한함, 그 슬픔과 죄의 범벅을 경건하게 신께 ‘빌어야’ 한다. 낮게 침잔된 ‘비운’ 마음으로.
저쪽 한켠 어디선가 며칠 째 의식 없이 눈 못 뜨는 어머니 얼굴에 대고, 또 하나 외마디가 강한 스타카토로 공간을 가로 지른다.
“하나님이 안된대?”
“엄마 권사님인데도?”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