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인가
‘민경혜가 죽었대’
가끔 느닷없이 사람들이 낮은 목소리로 그렇게 읇조리는 장면이 떠오르고, 이미 이제 나도 모르게 내 몸에 스며든 각오인지 아니면 소스라치는 놀라움인지도 분간 되지 않으면서 그저 몽롱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순간들이 생겼다. 살아있음의 대단함이 거의 황홀감을 주는 그만큼 사라질 날의 허망함도 끔찍하다. 내게 주어졌던 하나의 이름, 몇몇 이 들의 애잔한 시선 속에 허공 중에 부서져 흩어져 갈 그 하나의 이름, 그 뒤에는 정녕 무엇이 있었을까?
그 입구조차 알 수 없는 질문, 나는 누구인가? 현실적으로 의미 있는 답이 주어질 수 있는 경우는, 길 잃었던 치매증상 환자가 가까스로 스스로의 신원을 마치 쥐어짜듯 기억해내는 순간뿐일 듯하다.
우선, ‘무엇’이 나인가가 더 쉬울지 모르겠다. 내가 좋아하는 것(사람을 포함하여), 내가 싫어하는 것, 내가 미워하는 것, 내가 존경하는 것, 내가 두려워하는 것 등등 이런 모든 것들의 총합이 ‘나’일까? 아니면 바로 그 총합이 제거되고 남는 그 무엇이 비로소 ‘나’라고 불릴 수 있는 어떤 실체일까? 우리 평범한 사람들은 그 전자 쪽의 총합을 보통 자기 자신으로 여기고 살아간다. 나는 어떨까?
나는 커피를 좋아하고, 음악을 좋아하고, 돈을 좋아하고, 여행을 좋아하고, 차가운 사람, 진정성 없는 사람, 변명이 많은 사람을 싫어한다. 좋아하는 사람을 헤아려보니 10명 정도, 참 고마운 일이다. 좋아하는 사람보다 미워하는 사람이 더 많다. 돌이켜 보면 허겁지겁, 전전긍긍, 지리멸렬, 실수투성이로 살아오는 동안 어찌 이렇게 미운 사람이 많이 생겼을까? 애증의 관계로 경계선에 있는 사람도 있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요즘의 나에게 첫 외손자 사랑은 120% 넘쳐난다. 이렇게 장황하게 설명하지만 이것이 ‘나’인가? 뭔가 부족하거나 비어 있거나 빠져있는 것 같다.
후자의 ‘나’가 아마도 하나님이 당신 앞에 서기를 바라는 ‘나’인 것으로 생각된다.
심리학자 조하리가 말하는 이른바 마음의 네 가지 창에 나를 대입해 본다. 첫째, ‘열린 창’(자신도 알고 남도 아는 부분)에 나는 어떻게 비칠까? 염치없는 거 아닌가 하는 아련한 주저가 스쳐가긴 해도 ‘착하다,’ ‘부지런하다’ 이런 낱말들이 그래도 떠올려진다. 그러나 착하다는 건 심각하게 이기적인 아집이거나 단순한 무능의 다른 말일 수 있어 두렵고, 부지런하다는 것 역시 쓸데없이 분주하다는 뜻일 수 있다는 걸 왜 모르겠나. 두 번째, ‘숨겨진 창’(자신은 아는데, 남이 모르는 부분)에 보이는 나는 ‘충분히 고백’하기조차 어려운 혼돈이며 오롯이 하나님 앞에서 회개의 부분으로 남겨질 것이다. 세 번째 ‘보이지 않는 창’(자신은 모르는 부분, 남이 아는 부분)의 나를 나는 모른다. 살아 온 세월의 크기만큼 부끄러움에 식은땀이 흐르며, 주위에 있던 모든 사람들에게 용서를 빌어야 할 부분이다. 베푼 것 1에 상처준 것은 100이리라. 그러나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에 기대어, 스스로 깨닫지는 못한 어떤 선(善)함이 내 속에 있어 누군가에게 기쁨을 준 순간들이 많이 있었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간구해 본다. 네 번째, ‘암흑의 창’(자신도 모르고 남도 모르는 부분)에 잠겨있는 나는 그림자이며 내 이름이 흩어질 때 해방될 하나의 비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