甚深(심심)한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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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조사의 인사는 기쁨은 배가 되게 하고 슬픔은 반으로 준다는 상부상조의 미덕에 있다. 얼마 전 노모의 장례식에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조문을 받았으나 지금 기억에 남는 인사말이 별로 없는 것을 보면 위로 인사의 난감함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나 또한 지인의 장례식에 갔을 때 인사의 궁색함으로 어정쩡하게 그 상황을 지나쳤던 순간이 기억난다. 축하의 말보다는 위로의 말이 쉽지 않음은 상황에 맞는 적합한 인사가 없어서일까? 게다가 공감능력이 부족한 탓도 있겠지만 누군가를 위로하려고 한 인사가 상대에게 오히려 상처가 되는 경우도 있다.
사람의 마음이 극한적인 때일수록 말이라는 것이 거의 아무런 힘이 없다는 것의 반증인지도 모르겠다. 요즘 장례의식은 영정 앞에 분향을 하고 헌화로 짧은 목례를 한 후 상주 측과 절을 나누는 식이다. 예전에 비해 절차가 짧아져 형식의 간단함 대신 위로의 말이 더 중한 분위기가 되었다. “상심이 크시겠습니다", “병환 중이시라는 소식을 듣고도 찾아 뵙지 못하여 죄송합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좋은 곳에 가셨을 겁니다“. ”힘 내세요“ 등등.
슬픔을 반으로 나누는 공간이며, 인생의 종착역이 되는 장소에서 위로의 말 몹시 궁함에 대부분의 조문객들은 머뭇거리셨다. 상을 당한 사람에게 건네는 말로 더 이상 합당한 말이 없어 눈도장이나 찍고 왔다는 이기적인 처세로 끝나고 마는 경우가 더 많았다.
일본인들이 여러 경우에 자주 쓰는 말로 복잡한 상황을 아주 유용하게 처리해 주는 단어로 ‘도모(どうも)’라는 낱말이 있다. ‘안녕하시냐’는 극히 단순한 안부에서부터, 예컨대 ‘감사합니다’, ‘어서오세요’ 등 다양한 뜻을 전달해 주는 낱말이다. 그런데 이 말이 문상객의 조문 인사로도 적절히 사용된다고 한다. 조문 인사로 쓰일 때 이 낱말의 미덕은 아마 이것일 것으로 짐작된다. 쓸데없는 말의 무력감을 서로 느끼지 않게 해 주고, 서로 간에 복잡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당신이 겪고 있는 슬픔의 공간에 내가 지금 함께 있다’는 인사, ‘용기가 필요하다. 너무 슬퍼하시지 마시라’, ‘이심전심’ 등이 아닐까?
우리말에는 애매한 상황을 피하고 싶을 때, 두루뭉술로 엮어 말해 할 때 ‘거시기’, ‘거시기 해요’처럼 편하게 쓰는 낱말이 있지만 ‘도모(どうも)’와 같은 역할을 하면서 무난하게 쓸 수 있는 낱말이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조문객 중에는 분향 후 목례 대신 절을 하는 분들이 간혹 계셨는데 한 마디의 위로의 말보다는 차라리 온몸으로 절을 하는 그 몸짓에서 무언의 위로가 되었다. 헛된 위로가 오히려 상처를 주는 경우를 있어 차라리 무언의 인사가 더 절실하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갑작스레 젊은 나이에 남편과 사별을 하게 된 한 친구는 성직자나 교인들의 ‘기도하세요’라는 말에 신앙의 무감각을 느꼈다고 하였다. 쓸데없는 말보다 따뜻한 미소로 손을 잡아 주는 것이 슬픔을 훼손하지 않고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다. 흔히 쓰는 말 중에 ‘힘 내세요’라는 인사에도 저항을 느낀 적이 있었다. 격려의 인사로 한 말이지만 억장이 무너질 정도로 가슴이 아픈데 어디서 힘이 난단 말인가? 평안을 주기 위해 ‘아마 천국에 가셨을 거예요’라는 말에 속으로 ‘그럼 당신도 가보시지요’ 라는 말을 속으로 삼켰다고 한다.
성경 욥기의 주인공 욥은 하나님이 보시기에도 무결점의 모델이다. 어느 날 갑자기 열 명의 자식과 아내를 잃고, 재산도 다 사라지고, 기왓장으로 부스럼을 긁는 심한 욕창까지 생겨 극심함 고통을 받게 된다. 이 고통 중에 있는 욥에게 위로를 하기 위해 친구 셋이 찾아온다. 친구들은 처음엔 욥을 동정한다.
욥은 어줍지 않은 친구들의 위로를 헛된 것이라고 말하면서 친구들의 근거에 대해 동의하지 않으며 인내한다. 욥의 까닭 없는 고통을 보면 하나님께 무고죄를 씌우고 싶은 심정이지만 고해라는 인생의 바다에서 인간은 감히 ‘위로’를, 받거나 주기에는 과분한 존재인지 모른다.
레이먼드 카버의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단편에서는 아들의 생일 케이크를 미리 주문해 놓고 찾아가지 않은 부모에게 빵집 주인이 불평의 전화를 계속 한다. 갑작스레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게 된 아들의 사연을 모르고.
평소에 가족 없이 외롭게 지내면서 평생 다른 가족의 축하 케이크를 만들어 온 빵집 주인은 사정을 알게 된 후 악의는 없었지만 자신 때문에 상처받은 그들에게 진심으로 사과하고 용서를 구한다.
그리고 “뭘 좀 드시고 기운을 차리는 게 좋겠소. 이럴 때 뭘 좀 먹는 일이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될 거요”라며 오븐에서 갓 구운 따뜻한 계피 롤빵과 커피를 그들에게 권한다. 부부는 빵을 먹으며 알 수 없는 따뜻함을 느끼고 그의 진심어린 말에서 마음의 위안을 받게 된다. 그가 부부에게 건넨 ‘별것 아니지만, 위로가 되는’ 것은 롤빵과 커피였다.
힘은 없지만 위로를 받길 원하는 사람들이 주위에 많다. ‘힐링’이란 말이 여기저기 붙어 다니는 걸 보면 어쩔 수 없이 일시적인 치유라도, 달콤한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이 많은가 보다. 작가는 고단한 삶에 지쳐 있거나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독자에게 힘이 되는 글로, 요리사는 집밥처럼 따스한 음식으로, 디자이너는 마음을 감싸주는 옷으로, 음악가는 깊은 울림을 주는 곡으로.....
헬조선에 사는 젊은이들에게도.
한동안 세월호 사건에 대해 유가족들에게 ‘심심한 위로’의 뜻을 전한다는 뉴스 앵커의 표현이 제대로 전달이나 되었을까? 심심해서 하는 위로로 오해한 건 아니지만 그 말이 공허하게만 들린 것은 표현의 궁색함 때문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