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돌려 드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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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출판 된 전성태의 단편집 ‘두번의 자화상’ 마지막 편에 ‘이야기를 돌려드리다’라는 작품이 수록돼 있다. 이 단편은 한 동안 내 마음을 우울하게 붙들었다. 요양원에 계신 주인공 노모의 모습에 얼마 전 세상을 떠난 내 어머니의 모습이 어른거려서였다. 육체적 고통에 치매라는 기억상실의 불행이 덧씌워진 생의 마지막 픙경. 노환은 어쩔 수 없으나 치매라는 상실은 거역하기 힘든 회한을 부른다.
아들은 치매로 요양원에 계신 어머니에게 먼 어린 시절 어머니에게서 들었던 이야기들을 끄집어내어 조금이라도 기억을 되살려 주려 애쓴다. 기억이 없다면 어머니는 누구일까? 아들은 계속 엄마의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지금 막 꼴깍한 사람의 몸에서 나온다는 혼불’과 그 혼불을 본 사람의 꿈이 갖게 되는 신비한 예언 능력, 산과 바다에서 반반씩 산다는 산갈치, 백년에 한번 핀다는 대꽃, 동티날까 굿을 해야 한다던 할머니의 판타지 세계... 매번 마지막은 똑깥다. 어릴 때 어머니를 보면 항상 했던 말. ‘밥 좀 줘’. 미동도 하지 않던 어머니의 눈은 그때 반짝인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마들렌 과자’가 주인공의 어린 시절을 환기하듯, 기억은 어느 순간 저 내면 깊은 곳에서 돌발적으로 과거와 현재를 잇는 초시간적 감각으로 되살아난다. 아들은 바로 그렇게 어머니의 인생을 찾아 드리려 한다.
어머니는 아들의 음성 속에서 죽음의 순간까지 시간의 순서 없이 당신이 쌓아 놓은 숱한 기억들을 오르내린다. 요양원 침대에 누운 어머니에게 옛이야기는 이미 희미할 대로 희미해진 당신의 존재를 몽환처럼 확인하는 순간들이고, 그것들은 도무지 잊을 수 없는 생의 전체 기억의 테였으리라.
치매의 뇌과학적 설명은 뇌의 신경세포 손상으로 인한 기억 소멸, 그에 따른 소통의 불능, 정신적 추락, ‘삶이 지워지는 병’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단편을 읽으면서 나는 생각했다. 그러므로 기억의 되살림이야말로 곧 치매의 치유인 셈이며 비록 조각난 것이나마 생을 다시 한 번 움켜잡는 것이라고.
아들의 ‘밥 좀 줘’에 반응하는 어머니를 보면 한 그루의 나무테처럼 사람에게는 분명 기억테가 있나보다.
기억의 편린들이 모아져 쌓인 한 사람의 정체성은 이제 사라졌으나 그 기억테에는 스스로도 어찌할 수 없는 사랑과 그리움이 고스란히 스며있음에 틀림없다. 한 줄 한 줄의 나이테는 온갖 시련을 견뎌 낸 질긴 생명의 줄이다. 아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로 어머니는 희미하게 가끔 그 기억 속에 떠오르고 아주 잠깐씩 그 기억의 주인이 된다. 세상에서 가장 막막한 생의 치유이다.
치매, 그 가혹한 생의 마지막 고비에서, 나에 대한 아무 기억이 없는 어머니를 바라보는 아들의 심정.
“어머니, 기억을 돌려 드려요.
어머니 몸도, 어머니 기억들도 낙엽처럼 가볍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