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없는 말 한마디
서청자
글이란 최면 치료사가 최면을 통해 멀어졌던 시간 속을 헤집고 다니며 내 삶의 부분들을 들추어내는 것 같다. 기억의 밑바닥에 켜켜이 다져서 숨겨 두었던 경험, 말 못한 일들, 희로애락을 글에 의해 마음이란 거울에 비추어 나타나기도 한다. 가슴 아픈 일을 울지도 못하고 가슴 치던 일, 아름답고 행복했던 삶의 지난 세월의 경험을 글로 나타내므로, 훨훨 하늘 높이 날려 버릴 수도, 상처받은 마음을 치유할 수도 있는 신기한 마술을 가진 것이 글이란 존재라 생각 한다. 오늘도 마음속 깊은 추억을 들추어내 준다.
내 나이 8살 때이다. 6.25 전쟁이 일어났다. 우리 가족은 낙동강 상류근처 현풍이란 시골에 초가집을 얻어 피신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치열한 낙동강 전투의 현장으로 찾아간 꼴이 되었다. 1950년 8월과 9월 사이에 낙동강을 중심으로 국군과 유엔군이 북한군을 방어한 치열한 전투가 있었다. 한국의 운명이 달린 최대 위기였던 힘든 전투가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벌어졌던 것이다.
한더위가 좀 지난 어느 날 아침밥을 먹고 있는데 막내 삼촌이 숨이 턱에 닿아 달려왔다. 밖을 나가보니 “낙동강 전투가 치열하여 이곳이 위험하니 빨리 나가야 합니다.”라고 말하는 동시에 지금 버스가 마지막 버스이니 어서 몸만 나오라고 하였다. 입은 옷에 어른들은 급한 것만 챙기고 밥 먹던 수저를 놓은 채 뛰기 시작했다. 겨우 마지막으로 버스를 타고 보니 버스 속은 콩나물시루같이 빽빽하였다. 버스 중간 바닥에 앉았다가 일어서 보니 멀리 집들이 불타고 있었다. ‘급박한 일이 났구나’ 생각하며 어린 나는 무서움을 느꼈다. 한 아주머니가 치마를 벗어 창문을 가리자 다른 아주머니도 똑같이 했는데 그때는 그 이유를 몰랐다. 아마도 유리가 깨지거나 불꽃이 튈까봐 그렇게 한 것 같다는 추측이다.
오랜 시간 겨우 그곳을 빠져나와 한 마을에 도착하니 배가 고팠다. 마을 어귀 한 초가집 처마 밑에 보리 삶은 채반이 매달려 있었다. 그것을 자꾸 쳐다보고 있으니 집주인 아주머니가 주먹만 한 뭉치를 나에게 주었다. 얼마나 반가웠던지 꿀 맛 같은 한 뭉치를 한번 먹고는 옆에서 나를 보는 사촌 남동생을 보니 차마 입으로 가져 갈 수 없어 동생에게 주었다.
그때 한 뭉치의 보리밥을 주신 아주머니의 따스한 손길은 70세가 넘은 지금도 머릿속 사진틀 속에 남아있다.
그 후 온 식구가 걸어서 사과 농장으로 갔다. 그곳도 피난민이 몰려있었다. 방 한 칸을 얻어 식구들이 기거하면서 지낸 기억이 난다. 철없는 나이라 나와 어린 동생은 넓은 사과농장을 뛰어 다니며 놀았다.
어느 날 할머니께서 사과를 사 오라고 바구니와 돈을 주셔서 농장 입구에 갔다.
젊은 군인과 사복차림의 남자 서너 명이 나에게 웃으면서 “너 삼촌 어디 있니” 하고 물었다. 무심코 “저 뒤쪽에 있어요” 라고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조금 후 그 방에서 2-3명 정도의 남자들이 붙들려 나왔다. 젊은 남자는 무조건 잡아 갔던 것 같다. 한 젊은 남자의 어머니는 울면서 5대 독자라고 붙들고 늘어졌다. 그 당시 어린 나는 아무런 사정도 이해를 못했고 울부짖는 어머니의 모습에 마음이 멍멍하고 두려워서 얼른 어른들 뒤에 숨었다. 그때 나 때문에 일이 벌어진 것을 어른들이 알았으면 ‘얼마나 혼이 났을까’하고 지금은 쓰라린 가슴을 만지지만, 부모 자식을 갈라놓는 울부짖음은 내 마음에 녹아들어 잊혀 지지 않는다.
말속에 강력한 생명력이 있을 수 있고 사람의 마음을 바꿀 수 있는 자력이 있을 것이다. 한 사람의 닫힌 문을 열어 희망과 용기로 인도하기도 하고 마음을 평온하게 해 주기도 하지만 독이 될 때는 마음의 깊은 상처가 되리라. 어릴 때 그 사건이 지워지지 않기에 무서운 말의 힘이 머릿속에서 바람을 몰고 맴돈다.
말에 대한 오해와 사건들은 언제나 우리 삶의 언저리에 있다. ‘언어는 인격이다’라는 말처럼 말은 그 사람의 인격과 향기를 맡게 한다.
어린 아이가 철없이 뱉은 말에 다른 사람의 인생이 바뀔 수도 있었으리라.
말조심을 일깨우는 이 사건을 철이 들고 깨달았으나 아무에게도 말을 못했다.
글을 쓰므로 말 못한 것을 털어놓는 마술에 걸려 마음속 깊은 이 일을 꺼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