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운동화] 신영애
“나 신발 한 켤레만 사다오.
그냥 다른 사람 말고 네가 꼭 사주었으면 좋겠는데"
두해 전 친정 엄마를 뵈러 갔었다. 언니와 함께 쇼핑을 하고 나오는 길 이었다. 잠시 앉아 있던 자리에서 엄마는 뜬금없이 내게 말씀하셨다. 언니가 주차장에 차를 가지러 간 사이였다. 나는 어디 마음에 두신 신발이 있으신 거냐고 여쭈어 보았다. 엄마는 아주 오래전부터 마음에 두신 듯 불편하신 걸음으로 천천히 나를 데리고 가셨다. 고무 밑창이 튼튼해 보이는 할머니들이 많이 신으시는 듯한 평범한 신발이었다. 나는 더 좋은 신발이 없냐고 가게 사람에게 물어보았다. 그러자 엄마는 “그냥 이 신발이면 돼”하셨다. 내가 사 드린 신발을 보시면서 엄마는“좋은데 갈 때만 아껴 신어야지.” 말씀하셨다. 다음에도 또 사드리겠다고 말씀 드려도 언니 오빠들이 들이면 섭섭할 수도 있겠지만 여든을 바라보시는 엄마는 “아, 좋다. 참 좋다”를 연신 말씀 하셨다.
어린 시절 엄마 손잡고 시장 구경 가는 것이 참 좋았다. 사랑이 많으신 엄마는 장을 다 보고 나시면 언제나 그랬듯이 호떡이나 감자 떡 같은 군것질거리를 사주곤 하셨다. 그날따라 나는 이런 것들이 다 맛이 없었다. 시장 입구에 위치한 신발가게에서 본 빨간 운동화가 자꾸 생각이 났기 때문이다.
새 신발을 갖고 싶었던 작은 오빠가 며칠 전 고무신을 시멘트 벽 에 대고 비비면서 한 말이 생각이 났다. “이렇게 하면 밑창이 빨리 닳아서 엿 바꿔 먹을 수 있어. 그럼 나도 엄마한테 새로운 운동화 하나 사 달라고 할 거야.” 오늘은 엄마가 작은오빠 운동화를 사 주실 거라는 생각에 어쩌면 나도 새 신발을 함께 사 주시려나 생각했다. 그러나 엄마는 작은오빠 신발만 사셨다. 내가 자꾸만 쳐다보던 빨간 운동화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나는 왠지 억울했다. 이게 아닌데... 나 저 신발 갖고 싶은데...
마음 깊은 곳에 점 찍어둔 빨간 운동화를 그냥 두고 돌아서는 어린 마음에는 슬픔이 차 올랐나보다. 나는 집에 오는 내내 훌쩍 거렸다. 집에 와서도 울고, 잠들기 전까지 울고, 다음날 일어나서 아침부터 울고. 점심 먹고 또 울었다. 그렇게 사흘을 빨간 운동화에 대한 상사병으로 눈물바다를 만들고 있었다. 그런 나를 보다 못한 엄마는 다음날 장날도 아닌데 나를 데리고 시장엘 가셨다. 엄마는 며칠 전 작은오빠 운동화를 샀던 기억을 애써 떠올리며 아저씨한테 단돈 몇 푼이라도 깎아 볼 흥정을 하셨다. 신발가게 주인은 사실 그 빨간 운동화는 주인아저씨의 따님을 위해 사온 거라고 하셨다. 그런데 사이즈가 작아서 그냥 팔려고 내 놓은 것 이라고 하시면서 인연은 따로 있었다는 듯이 예쁘게 잘 신으라고 하셨다.
아직 눈물 콧물이 채 마르지 않은 어린 나는 그렇게 갖고 싶었던 빨간 운동화를 신고 언니 오빠들에게 자랑을 하며 뽐내고 다녔다. 작은 오빠는 새로 산 운동화를 아까워했다. 그래서 학교 갈 때만 신고 친구들과 놀 때는 낡은 고무신을 신었다. 작은오빠는 “나 새 운동화 저기 있어. 놀 때는 이 고무신이 편해서 그냥 신고 있는 거다”했다. 그러나 나는 문밖을 나서는 일만 있으면 어김없이 그 빨간 운동화를 신고 폼을 재며 다녔다. 좋은 신발은 좋은 곳으로 인도한다는 믿음이 그 어린 마음에도 있었던 것일까.
어릴 적 그렇게 갖고 싶었던 빨간 운동화를 사 주셨던 엄마에게 이제 내가 신발을 사 드릴 수 있어 행복했다. 연로하셔서 건강은 좋지 않지만 손녀딸과 구구단 시합도 하실 정도로 총명하시다. ‘어머니’보다 ‘엄마’로 더 오래오래 건강하게 우리들 곁에 계셨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