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군대 보내기
장 석 률
사는 일이 바쁜 것도 아니건만 어쩌다 보니 늦게 결혼을 했다. 결혼을 하고도 한참 만에 아들을 낳았다. 아들이 서너살 무렵 천진난만하고 밝기만 한 개구쟁이 모습에 인생의 재미와 사는 이유를 알았다. 아들이 점차 성장하면서 말수가 적어지고 퉁명스러워졌지만 그래도 내게는 영원히 듬직한 아들이다.
지난주에 논산훈련소에 데려다 주었다. 대한민국에 남자로 태어난 이상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이제 더 이상 내 아들이 아니고 당분간은 국가의 아들이다.
돌아보면 내가 군대에 갔다 온지가 엊그제 같은데 세월 참 빠르다. 군대 가기 전날 밤 동네사람들이 잘 갔다 오라는 말부조를 건넸다. 마지막 밤을 자는 둥 마는 둥 보내고 아버지에게 큰절을 하고 집을 나설 때 엄마가 차부까지 데려다 준다는 걸 굳이 마다하고 혼자 집을 나섰다. 아마도 눈물을 보이기 싫어서 그랬건 것 같다. 삼거리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 나오는데 왜 그리 눈물이 나왔는지 모르겠다.
삼십년 세월이 지났건만 우리는 여전히 군대에 가야된다.
아들이 입영통지서를 받았다. 휴학을 하고, 핸드폰 정리하고, 통장 정리하고, 사용하던 책상과 PC도 정리했다. 주변친지 돌아가며 식사도 하고, 조상님께 성묘하고, 마지막으로 머리를 깍았다.
논산훈련소 데려다 주던 날…….
너무나 긴장한 모습이 안쓰러워 제대로 말도 붙이지 못하고 가슴을 졸였다. 논산훈련소로 가는 길엔 자동차 소리만이 정적을 가로 막았다.
훈련소에 도착해서 긴장되는 마음을 채 정리하기도 전에 아들은 연병장으로 뛰어 들어가다가 뒤돌아 보는 눈동자엔 두려움과 아쉬움이 가득 차 있던 모습을 내가 정신줄 놓기 전에는 잊지 못할 것이다.
논산훈련소에서 돌아오는 차안에는 이제 나와 아내 둘이다. 불안하고 안타까운 맘을 달래고자 개심사로 갔다. 부처님께 절하며 아들의 무사 안녕을 빌고 또 빌었다.
부디, 더 건강하고, 더 성숙하고, 더 당당한 아들로 돌아오기를 기대하며…….
훈련소를 마치고 첫 면회를 갔다. 평소 좋아하던 피자, 치킨, 콜라를 사고 갈비찜을 해가지고 갔다. 얼굴은 튼튼해 보였지만 아직 긴장하는 눈빛이 여전하다. 안쓰러웠지만 해줄 수 있는 게 없다. 경기도 양평으로 자대 배치를 받고 첫 휴가를 나올 때까지 그 긴장감은 유지되었다. 이후 두 번째 휴가를 나온 아들의 얼굴에도 평화로움이 감돌 때쯤 우리 부부의 걱정도 식어갔다.
아들은 군대를 갔다 오면서 터득했을 것이다. 살다보면 하기 싫은 일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고 견뎌내야 하는 게 사람 사는 것이란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