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군대 보내기
장 석 률
사는 일이 바쁜 것도 아니건만 어쩌다 보니 늦게 결혼을 했다. 결혼을 하고도 한참 만에 아들을 낳았다. 아들이 서너살 무렵 천진난만하고 밝기만 한 개구쟁이 모습에 인생의 재미와 사는 이유를 알았다.
아들이 대여섯살 무렵 막내처제(아들에게는 이모) 결혼식이 있었다.
남편이 경상도 포항 사람이라서 충남 당진에서 경북 포항까지 관광버스를 대절하여 다녀왔다. 오가는 길 온종일 버스를 타게 되다보니 버스 안에서 동네 어른들이 소위 <관광버스> 춤을 추자 아들도 엉덩이를 들먹 들먹 하더니 버스 통로로 내려가 어른들 틈에서 같이 춤을 추며 어울렸다. 당연히 시선이 아들에게 쏠리게 되었고 너도 나도 귀엽다며 만 원짜리 한 장씩 주셨다.
집에 돌아와 옷을 벗기다보니 주머니마다 접혀진 만 원짜리가 끝도 없이 쏟아져 나왔다.
아들이 점차 성장하면서 말수가 적어지고 퉁명스러워졌지만 그래도 내게는 영원히 듬직한 아들이다.
지난주에 논산훈련소에 데려다 주었다. 대한민국에 남자로 태어난 이상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이제 더 이상 내 아들이 아니고 당분간은 국가의 아들이다.
돌아보면 내가 군대에 갔다 온지가 엊그제 같은데 세월 참 빠르다. 군대 가기 전날 밤 동네사람들이 잘 갔다 오라는 말부조를 건넸다. 마지막 밤을 자는 둥 마는 둥 보내고 아버지에게 큰절을 하고 집을 나설 때 엄마가 차부까지 데려다 준다는 걸 굳이 마다하고 혼자 집을 나섰다. 아마도 눈물을 보이기 싫어서 그랬건 것 같다. 삼거리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 나오는데 왜 그리 눈물이 나왔는지 모르겠다.
삼십년 세월이 지났건만 우리는 여전히 군대에 가야된다.
아들이 입영통지서를 받았다. 휴학을 하고, 핸드폰 정리하고, 통장 정리하고, 사용하던 책상과 PC도 정리했다. 주변친지 돌아가며 식사도 하고, 조상님께 성묘하고, 마지막으로 머리를 깎았다.
논산훈련소 데려다 주던 날…….
너무나 긴장한 모습이 안쓰러워 제대로 말도 붙이지 못하고 가슴을 졸였다. 논산훈련소로 가는 길엔 자동차 소리만이 정적을 가로 막았다.
훈련소에 도착해서 긴장되는 마음을 채 정리하기도 전에 아들은 연병장으로 뛰어 들어가다가 뒤돌아보는 눈동자엔 두려움과 아쉬움이 가득 차 있던 모습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논산훈련소에서 돌아오는 차안에는 이제 나와 아내 둘이다. 불안하고 안타까운 맘을 달래고자 개심사로 갔다. 부처님께 절하며 아들의 무사 안녕을 빌고 또 빌었다.
우리 엄마도 나처럼 아들의 무사 안녕을 빌고 또 빌었을 것이란 걸 이제야 알았다.
부디, 더 건강하고, 더 성숙하고, 더 당당한 아들로 돌아오기를 기대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