멘터 故로렌스 클라인 교수를 생각하며
왕 이앤
2013년 10월 20일 로렌스 클라인 교수의 타계 뉴스가 나왔다는 친구의 전화가 있었다. 얼마 전 친구에게 여행계획을 말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듬해 1월 초 필라델피아에서 열릴 경제학회에 참석하여 그를 만나볼 계획이었기에 좌절감이 매우 컸다. 두 달 여의 지각으로 영원한 이별이 되었다. 2년 전에 미국 경제학회에서 가진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다음 해부터는 참석이 어렵겠다고 말했다는 그에 대한 기사와 사진을 신문에서 보았다. 그의 연세가 93세이고 근년에 체중도 많이 불어난 모습이어서 이번에는 꼭 찾아볼 계획이었다. 10년 전 동경의 한 만찬 장소에 처음 지팡이를 짚고 나온 그에게 나는 ‘지팡이가 필요하세요( Do you need a stick)’하고 즉흥적으로 말했는데 그는 대답을 피하였다. 생각 없이 경솔한 말을 한 것에 대해 깊이 후회한 적이 있었다. 전에 한국에 몇번 왔을 때는 김과 홍삼차를 선물했는데 이번에는 보다 좋은 선물을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오래전에 그가 서울에 왔을 때 몇 명과 같이 비원과 민속촌을 구경 갔던 생각도 난다. 7년 전에 그가 강연을 하기 위해서 마지막으로 서울에 왔을 때 사람을 시켜 나를 찾았다. 경제예측 세미나에 정기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지, 그리고 무릎 꿇고 기도 하고 있는지 등을 물었다. 나에게 특별히 신경을 써주는 것 같아 대단히 고마웠다. 미망인에게 조문편지를 보내야겠다고 생각만 하고 있다가 얼마 전 그를 꿈에 다시 보고 나서 지난주에야 편지를 발송했다.
1970년대 초에 내가 펜실바니아 대학 (펜 대학)으로 유학을 하고 그를 박사논문 지도교수로 가지게 된 것은 큰 행운이었다. 학위논문을 위해서 경제정책 효과 분석을 위해 한국의 계량모형을 만들었는데 그는 모형 작성에 관해서는 약간의 코멘트만 했고 정책 모의실험 (simulation) 결과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한국경제의 주요변수들을 이용하여 몇 십 개의 방정식으로 된 계량모형을 만들고 컴퓨터를 활용하여 정책 모의실험을 하고 정책 효과를 분석하는 것으로 논문을 써서 통과되었다. 그 이후에도 우리는 꾸준히 연락을 했다.
1979년 말 나는 계량모형을 이용하여 원화 환율을 달러에 대해 20% 평가 절하할 경우의 경제적 효과를 측정하고 원화를 20% 평가절하 할 것과 환율 제도를 복수통화군 제도로 변경할 것을 정부에 건의하였다. 1980년 초에 이 제안대로 정책이 실시되어 당시의 심각한 경기침체와 외채문제에 무리 없이 대처할 수 있었다. 정부의 5개년 경제계획 작성 때에도 나의 예측모형이 사용되었고 기업과 금융기관들에게 정기적으로 경제예측 서비스를 제공하였다. 아세아 개발은행에서 동남아 나라들의 경제예측 모형을 만들기도 하였다. 1997년~1998년과 2008~2009년의 우리나라 금융위기를 각각 2~3년 전에 내가 예측할 수 있었던 것은 계량모형과 경기예측 경험을 쌓았기 때문이었다.
클라인 교수는 유태인계로서 MIT 새뮤엘슨 교수의 제자였고 케인즈 학파의 대표적 이론가였으며 경제예측 모형의 창시자이다. 쉬카고 학파를 중심으로 한 자유주의 사상에 반하여 정부가 적극적으로 경제에 개입해야 된다는 것이 케인즈 학파 이론이다. 제2차 대전 후 미루어진 소비수요에 힘입어 미국경제가 붐을 가질 것을 예측하고 적중되어 큰 주목을 받았다. 1950년대 전반에는 맥카시즘 (McCarthyism: 반 공산주의 운동으로 당시 상원의원 맥카시의 주도로 일어나 많은 사람들이 공직에서 물러났다.) 선풍으로 미국을 떠나 영국과 일본 대학에서 수년간 교수생활을 하였다. 1940년대에 짧은 기간 동안 공산당의 당원으로 등록된 적이 있어 공산주의자로 몰렸기 때문이었다. 4년 후 펜 대학교수로 돌아와 1958년부터 1991년까지 33년간 경제학을 가르쳤다. 시내에 워튼 계량경제연구소를 설립하고 계량모형을 개발하여 정책효과 분석과 경제예측을 하였고 예측력이 뛰어나 많은 나라와 기업에서 예측 보고서를 구독하였다. 또한 세계 주요국가, 지역의 계량 모형들을 연결하여 세계 계량모형을 만들고 세계경제를 처음으로 일관성 있게 예측하였다. 한 나라에서 통화량이 증가하거나 석유가격이 상승하는 경우에 그것이 다른 나라에 파급되는 효과도 측정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업적으로 1980년에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다. 1970년대 후반 지미 카터가 출마한 대통령 선거운동에서 자문역을 했고 후에 대통령을 위한 경제자문회의 의장직을 제의 받았으나 거절하고 학교로 돌아갔다. 이때 가진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기술자(technician)가 도움을 요청 받았을 때 도움을 주는 것이 시민의 책무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많은 노벨 경제학 수상자 중에서 국가, 기업, 개인의 활동에 가장 유용한 연구 업적을 남겼다. “경제학에서 유일하고 만족할만한 테스트는 예측능력 (ability to predict)이다”라고 그는 말했다.
내가 그의 이름을 처음 알게 된 것은 1960년대에 저서 <<계량경제학 입문>>을 대학 도서관에서 본 때였다. 박사과정 입학에 더 많은 장학금을 제공하겠다는 다른 대학들의 오퍼를 뿌리치고 펜 대학을 택한 것은 대도시에 있는 아이비리그 대학이라는 것 이외에 그한테서 계량경제학을 배우고 싶은 마음이 컸기 때문이었다. 석사과정 이후 하와이대학에 남아서 계속 공부했다면 박사학위를 보다 안전하게 취득하고 학위 취득을 위한 공부기간도 2년을 절약할 수 있었으나 위험을 무릅쓰고 본토의 일류 대학으로 옮기기로 했다. 사실 장학금이 중단되거나 건강이 나빠지거나 큰 사고가 생기면 학위 취득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자격시험에나 학위 논문 발표가 통과 되지 못하여 중도하차 하는 사람도 많았다. 내가 펜 대학에 도착했을 때에 이 대학 정치학과에서 큰 불상사가 발생했다. 한국학생이 박사논문이 두 번이나 통과되지 못하자 심사교수들에게 총을 쏘아 한 사람은 사망하고 또 한 사람은 중상을 입었다고 했다. 이 대학에서는 수업내용의 수준이 높았고 세계 각국에서 온 우수학생들과 유명 교수들도 많았고 도서관 체제도 훨씬 잘 정비되어 있었다.
졸업 후 북미 대륙, 일본, 동남아세아 그리고 한국에서 직장을 잡을 때도 그는 친절하게 추천서를 보내 주었다. 대학이나 연구소 등에 응모할 때는 세 명의 추천서가 필요한데 그의 추천서는 빠지지 않고 보내졌다. 1980년대에는 그가 주관하던 세계 각국 계량모형 연결 사업에 회원으로 참여하여 여러 나라 학자들과 함께 경제예측 논문을 발표하였으며 2000년대에는 그가 주도하던 ‘평화와 번영을 위한 경제학자 모임“에 참여하여 수년간 논문을 발표하였다. 그가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후 우리나라 교육 TV방송국에서 그의 업적과 그에 대해 이야기 해달라는 요청으로 나는 몇 번에 걸쳐 방송을 하였다. 그가 65세에 은퇴한 후에는 제자, 지인들과 펜 대학교가 연구기금을 조성하였고 대학교는 처음으로 그를 벤자민 프랭클린 석좌 교수로 임명하였다. 그는 강의 부담 없이 연구실에서 연구업무만 하였다. 그의 큰 얼굴, 넓은 이마 온후한 인상은 유펜 중앙도서관 앞에 있는 벤자민 프랭클린 동상의 얼굴과 많이 닮았다. 항상 온유하고 웃는 얼굴에 겸손하고 친절했으며 개발도상국 경제에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미국을 비롯하여 여러 나라 정부에 자문 하였고 1970년대에는 한국경제를 위해 자문역을 맡기도 하였다.
내가 대학에서 계량경제학과 국제경제학을 중심으로 40년 가까이 가르치고 연구하고 사회에 봉사한 내용들을 돌아보면 그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이 확실하다. 그의 높은 학자 정신(scholarship)과 온유하고 친절하고 겸손한 성품을 앞으로도 항상 기억하고 배우고 싶다. 나는 그에게서 화난 얼굴을 보거나 화난 말이나 거친 말을 들은 적이 없다. .
그가 생각날 때면 ‘무릎 꿇고 기도하느냐?’는 말이 생각난다. 내가 천국에나 임사상태에 들어가면 분명히 그를 만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