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주를 마무리 하는 금요일. 나에게 금요일 저녁은 한 주간의 쾌쾌묵은 때를 벗어 버리고 세상의 즐거움을 받아들이는 시간이다. 물론 금요일이 즐거움만 주는 것은 아니다. 그날도 나는 어김없이 여자 친구와 술자리에 올라 기억조차 나지 않는 사소한 말다툼으로 언쟁을 벌인다. 그 길로 여자 친구는 자리를 박차고 나가 돌아오지 않는다. 다시 보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보이지 않는 그녀를 생각하며 꺼지지 않는 휘황찬란한 도시를 거쳐 멈추지 않는 나무 몇 그루를 지나 그녀의 실험실에 도착한다.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일을 하고 있는 그녀를 보며 매정하다는 생각이 들어 다그치기 시작한다. 아무 말 없이 듣고 있더니, 나에게 한 마디를 던진다.
“졸려.”
달려가는 그녀를 쫓다 어제 다쳤던 허리가 아파온다. 잠시 제자리에 서서 가방을 뒤져 담배와 라이터를 꺼낸다. 6개월 동안 끊었던 담배를 다시 필까 고민하느라 가방 깊숙이 모셔 놓았던 담배였다. 담배를 입에 물다가 그 동안의 내 의지가 무너지는 것 같아 접어버린다. 내 마지막 자존심은 지키고 싶었나 보다. 도망가는 그녀를 바라보며 이제는 정말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든다. 문득 도망가는 강아지의 일화가 떠오른다.
목줄이 풀려 세상을 향해 힘찬 발걸음을 옮기는 강아지와 그 뒤를 쫓아가는 주인. 잡으려 해도 잡을 수 없었던 강아지와 힘이 빠져 주저앉고만 주인. 모든 것을 포기하고 넋이 나갔을 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주인 곁으로 다시 돌아온 강아지.
나는 목줄 풀린 강아지를 생각하며 그녀를 버려두기로 결심했다. 멀어지는 그녀를 바라보며 집어넣었던 담배 한 가치를 꺼내 입에 물었다. 들고 있던 라이터의 부싯돌이 반짝 하는 순간 묘한 상실감과 함께 편안함이 다가온다. 깊게 한 모금 들이마시고 뱉는 순간 그녀의 행동이 이해가 된다. 내가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해서는 안 되며, 안하는 것이 하는 것이다.
그녀가 말했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고 했다. 사람은 변하지 않기 때문에 맞춰가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거나 포기하는 거라고 했다. 자신 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자신의 성격을 벗어날 수 없고 마음에 빚이 생기는 것이라 했다. 내가 말했다. 사람은 변할 수도 있다고 했다. 너를 만나면서 10년간 끊지 못했던 담배를 끊었다고 했다. 나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도 자신이 고치려고 노력만 하면 틀에 박힌 습관처럼 고정화되어 변화할 수 있다고 했다. 그녀가 말했다. “법륜 스님”의 “스님의 주례사” 책을 보면, 기대를 하지 않으면 모든 사람이 아름다울 수 있고, 상대방에게 기대려는 마음만 버리면 평온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했다. 내가 말했다. 기대를 하지 않으면 너와 나의 관계는 이성관계가 아니라 단순한 인간관계일 뿐이라고 했다. 호의 동승과 같이 단순한 인간관계로, 사고가 나면 사실관계에 입각한 법률관계로 변질되는 콘크리트 벽을 사이에 둔 관계라고 했다. 우리는 그랬다. 같은 점도 많았을 텐데 다른 이야기를 했고, 다른 점도 좋았을 텐데 싫은 점만 이야기했다. 우리는 이별이라는 인생의 굴레를 맞아 각자의 세계에서 이야기 하고 있었다.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하는 게 사랑이라는데, 가슴이 잘 모르겠다고 하니 심장이 뛰는지 확인한 것과 같다. 그렇다면 멈추는 게 당연한 일이지.
여자 친구는 새로운 길로 접어들었고, 나도 가던 방향대로 걸음을 재촉한다. 다시 피운 담배는 독하지만 위로가 되었고, 연기와 함께 그녀와의 추억도 한 장의 사진처럼 흘러가 분산되어 사라졌다. 나쁜 기억은 모두다 하늘로 날아가 버리고 좋은 기억만이 내 가슴속에 남아 내 심장을 두드리기 시작한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남아 있는 그녀와의 발자취는 나와 함께해 마음속의 온전한 풍요를 가져다준다. 다른 길로 가는 것을 선택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착하고 아름답다. 혼자 걷는 길 역시 낭만적이다. 낙엽이 우수수 떨어진 잔디밭 오솔길을 걷다보면 나뭇가지 사이에 걸려 움직이지 못하는 태양도, 내려갈지 올라갈지 고민하는 청솔모 한 마리도 한 폭의 동양화가 되어 운치 있다. 학교 앞 잔디밭에 누워 잠식해가는 어둠을 바라보니 별 빛이 자태를 뽐내며 나를 지켜보고 있다. 엉덩이가 시려오는 고통은 내 오감을 만족시켜주는 데 일조하고 있다. 하늘이 허락해 비라도 내려 준다면 우산 없이 훌쩍 거리를 걷다 분위기 좋은 커피숍에 앉아 인적을 안주삼아 책 한권을 읽고 싶다. 오늘은 금요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