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개월만 있으면 정규과정을 마치고 박사학위를 받는다. 아버지와 졸업 후 인생 진로에 관해 이야기를 하다 말다툼을 하게 되었다. 아버지의 기대는 이해하지만 졸업을 맞이하며 내 인생은 내가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박사과정도 그랬다. 우리 가문에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이 없단다. 아버지는 박사 아들을 두고 싶다고 하셨다. 그 길로 대학원에 진학했다. 박사과정 동안 산전수전을 다 겪었다. ‘완벽한 것은 실행에 옮기기 직전까지’라는 말처럼 연구는 실험을 하기 전까지만 완벽했다. 머릿속의 완벽한 계획은 시작부터 붕괴되기 마련이었다. 측정 결과가 좋아 자료를 정리하며 밤을 새우던 날에는 참고문헌을 찾아보다가 좌절한 적도 있었다. 실험을 하기 전에는 분명히 찾지 못했던 자료였는데, 실험을 다 하고 나니 똑같은 실험을 한 논문이 보고가 되어 있었다. 잘 된 실험을 정리하며 가설대로 분석을 해 나가도 참고 논문의 결과 해석이 다양해서 내 자신도 확실한 믿음을 갖기가 어려웠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와의 추억을 떠올렸다.
중학교 때부터 아버지의 일을 따라 다녔다. 아버지는 건축 일을 하셨다. 새벽 6시에 출근해 모진 강도의 노동을 소모했고, 해가 넘어가고 나서도 일은 끝나지 않았다. 일하던 도중 아버지께 쉬고 싶다고 말했다. 다른 친구들처럼 방학 때에는 축구도 하고 오락실도 가고 싶은데, 어린 나이부터 일을 한다는 데에 불만을 늘어놓았다. 아버지께서는 한동안 아무 말씀 없으시더니 나를 지그시 바라보며 말씀하셨다.
“아들아. 사람은 무엇을 하던 먹고는 살아야 한다. 먹고 살려면 반드시 일을 해야 한단다. 아빠는 학창 시절에 학교도 제대로 못가고, 논하고 밭 매고, 감 따러 다녔단다. 학교도 걸어서 1시간씩 걸어가야 했는데, 할아버지의 일을 도와드리고 나면 학교에 도착해도 바로 돌아와야 했을 거야. 공부를 안했더니 받아 주는 곳이 없더구나. 공부를 안했으니 많이 한 사람보다 더 열심히 일하고 적은 돈을 가져갈 수밖에 없는 것이지. 공부 열심히 해서 아빠처럼 힘들게 살지 말고, 편하게 살아라. 이런 일을 하고 싶지 않으면 공부를 더 열심히 해. 지금 하는 일은 혹시 공부를 잘 못해서 공사장에서 일을 하게 된다면 기술을 배워 놓는 게 중요해. 기술을 배우면 어디에 가서든 먹고 살수 있단다. 그러니 지금부터 배워 두는 게 좋지.”
대학교에 입학하고 나니 아버지는 더 이상 나를 공사장으로 데려가지 않으셨다. 물론 방학기간에도 아버지의 출근시간인 6시에는 일어나야 했다. 아버지께서 나를 깨우고 나가시는 동안 나는 학교에 가는 척 준비를 한 뒤 나가시면 다시 잠자리에 들곤 했다. 공대인들도 경영학적 마인드를 가져야 한다고 배웠다. 대학교 3학년 때부터 경영학과 복수전공을 시작했다. 들어야 할 경영학과 전공필수 과목은 많은데, 공대 전공필수 과목도 충분히 듣지 못했다. 학기마다 24학점씩 신청하여 수업을 들었다. 공대 수업만 듣다가 경영학과 수업을 들으니 생소했지만 졸업을 위해서는 열심히 공부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일단 시작하고 보자는 것도 아버지의 철칙이었다. 수업이 겹쳐 하루에 세 과목 시험을 봐야 했다. 미리 공부를 해 두었으면 좋았겠지만 좀처럼 여유가 생기지 않아 전 날에야 공부를 시작할 수 있었다. 도서관에서 뜬 눈으로 밤을 새우며, 세 번째 시험 과목을 공부하고 있었다. 눈물이 쏟아졌다. 인생이 우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즐겁게 살기에도 부족한 시간인데 목숨 바쳐 공부하는 것이 한스러웠다. 도서관 밖으로 나가 잠시 걸었다. 적막이 드리운 가운데 달빛이 내 눈으로 들어온다. 아버지가 생각났다.
아버지의 일을 도와드릴 때의 일이다. 변기가 수없이 쌓여있었다. 승강기가 없었다. 원룸식 건물이었는데, 각 방마다 변기를 날라야 했다. 아버지께 같이 날라 줄 수 있는지 물어보았다. 아버지는 내 질문을 회피한 채, 두 개씩 나르는 게 좋은 것 같은데 아직 어리니 한 개씩 옮겨서 나르라고 하신다. 한참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아버지를 바라보자 아버지는 다문 입을 여신다.
“아들아. 아빠가 이것을 다 날라줄 수도 있어. 하지만 나는 같이 일하는 사람들을 조율하고 막히는 문제점을 풀어줘야 하는 임무가 있어. 나에게도 임무가 있고, 너에게도 임무가 있어. 때로는 네가 가진 목표가 너무 고되고 힘들지라도 좌절하지 말고 시작할 필요가 있어. 더 재미있는 것은 목표를 가지고 전진하다보면 어느새 너의 목표를 달성하고 다음 목표가 생긴다는 것을 알 수 있어. 인생은 그래서 재미있는 거란다”
그 당시에는 재미가 없었다.
이제 박사학위 과정을 마치고 사회로 나갈 준비를 하며 내가 가진 꿈이 생각난다. 지금까지의 삶은 나를 위해서가 아닌 타인에게 보여주기 위해 살아왔다. 부모님, 선생님, 교수님께 잘 보이기 위해 나를 성실한 사람으로 포장하게 만들었고 내 모습보다 더 훌륭하게 보이도록 내가 가지지 못했던 것조차 가진 것처럼 행동했다. 이제 내가 이루고 싶은 꿈을 향해 한 발자국 나아가고 싶다.
저녁에 아버지와 식사를 하면서 죄송하다고 말씀드렸다. 지금까지 나에게 사과 한 번 해보신 적 없는 아버지께서 미안하다고 하신다. 자신은 잘 몰라서 한 이야기니 열심히 해 보라고 하셨다. 무엇을 하던 내 편이라고 하신다. 아버지의 조언이 틀렸던 적은 한 번도 없다. 아버지의 조언을 받아드리며 내 꿈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