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 난전에 올망졸망한 것들이 얼굴을 내밀었다. 큰놈에 비하면 새끼라고 하기도 무색할 양배추들이었다. 상추, 깻잎, 청양고추, 감자, 양파 등은 좌판 위 빨간 소쿠리에 소복하니 진열해두고 기다란 우엉 옆에 뒹굴어져 있었다. 한 개에 천 원짜리 양배추를 그중에서 묵직한 놈으로 골랐다. 양념장에 넣을 청양고추에 쌈 싸먹기 좋을 조선배추도 한 움큼 샀다. 양배추는 살짝 데쳐서 양념장에 싸먹을 요량이었다. 여축없이 들어맞는 내 배꼽시계는 장을 보니 더 요동을 친다.
부랴부랴 옷을 갈아입고는 커다란 양은냄비에 물을 올렸다. 야물딱지게 보이는 양배추의 겉잎을 떼어내고 4등분을 했다. 중간에 굵은 심을 잘라내고 데치기 적당하게 떼어두었다. 액젓과 진간장을 반반 넣고 고춧가루, 깨소금, 참기름 뿌리고 대파와 청양고추는 잘게 썰어두었다. 물이 끓어오르자 잘라놓은 것을 넣고 데쳐냈다. 양배추는 너무 푹 삶으면 흐물거려 아삭거리는 식감이 사라지기에 잘 삶는 것이 포인트다. 그렇다고 덜 삶으면 너무 억세고 뻣뻣해 먹기가 거북해진다. 적당히 데쳐졌기에 얼른 찬물로 헹궈 소쿠리에 건졌다.
이것만 있으면 사실 다른 반찬이 필요 없다. 밥이 제일 맛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입을 즐겁게 해주는 주전부리보다는 이렇게 좋아하는 푸성귀와 밥 한 공기면 성찬 중의 성찬이다. 일 년 내내 채소만 먹고살라고 해도 할 수 있을 만큼 난 채식애호가다. 그렇다고 육식은 싫어하고 채식만 고집하지는 않지만 고기보다는 야채가 좋다. 그리고 내 입맛을 자극해줄 청양고추 몇 개만 있으면 금상첨화다. 잘 삶겨진 양배추 잎에 쌈을 싸서 게 눈 감추듯 먹어버렸다. 밥공기는 벌써 비워졌건만 쉬이 젓가락을 놓지 못한다. 넉넉하게 데친 양배추를 양념장에 자꾸만 찍어먹다 보니 속이 부대꼈다.
생각해보니 천 원짜리 한 장으로 몇 끼는 맛있게 먹을 수 있다는 것이 나를 흐뭇하게 했다. 아이들 과자 값보다 싼 가격으로 식사가 해결된다는 것은 상당히 경제적이다. 농사를 지은 농부들이야 그냥 버리다시피 했을 작물인지도 모른다. 참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과자 값보다 못한 농작물 가격이라니 그렇다. 내가 처음부터 양배추를 좋아한 건 아니었다. 한 때는 입에 대기도 싫은 채소이기도 했다.
종중 땅으로 일궈먹는 밭에 이미 한차례 배추농사를 실패한지라 양배추를 심는다고 했다. 배추처럼 벌레도 안 꼬여 약을 안 쳐도 되고 잘만하면 돈이 될까하여 심은 것이었다. 당시에는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농작물은 아니었다. 양배추는 통닭집에서 마요네즈와 케첩을 섞어 샐러드로 내놓는 정도였다. 나는 삶으면 덜큰한 그 맛이 영 입에 맞지 않았다. 양배추 특유의 냄새가 나서 싫었다. 조리법이 마땅치 않아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그저 푹 쪄서 양념간장에 찍어먹는 정도였다.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였다. 그 너른 밭에 양배추는 제법 잘 자랐다. 솟은 대궁위로 새파란 이파리들이 크는 모양새가 정겨웠다. 점점 더 자라니 캥거루가 새끼를 주머니에 넣듯 이파리를 오므렸다. 그러자 어른 머리만 하게 커져갔다. 잘만하면 우리 공납금 걱정은 안 해도 되겠다 싶을 만큼 농사는 풍년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사러오는 사람이 없었다. 잎은 누가 속살이라도 보자는 것처럼 꽁꽁 여며댔다. 조금의 빈틈도 없이 겹겹이 에워싼 때문인지 한 통의 무게는 만만찮았다. 애써 농사지은 것 그냥 썩힐 수는 없었다. 부모님은 그걸 어찌할지 골머리를 앓기 시작했다. 경운기도 한 대 없는 곤궁한 살림이었기에 뾰족한 묘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십 리나 넘는 길을 지게에 지고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또 그렇게 짐을 져 면소재지로 가져간다고 누가 사줄 것도 아니었다. 기껏해야 한 통에 오십 원 하는 것이 10통만 해도 무게가 엄청났다.
속은 타들어가고 보다 못한 엄마는 그것을 마대에 담았다. 그리고는 우리가 통학하는 버스에 올랐다. 안 그래도 승객이 많아 늘 만원버스인데 커다란 자루까지 실은 엄마를 버스기사가 달가워할 리 없었다. 욕지거리 비슷한 것을 듣고는 겨우 버스에 실을 수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이 창피해 멀찍이 떨어졌다. 가난이 부끄러운 게 아니라는 것을 도덕시간에 익히 들었지만 괜스레 열없었다. 그 무거운 것을 하나라도 팔아보려고 용을 쓰는 엄마가 안쓰러우면서도 친구들에게 놀림을 당할까 그게 더 염려되었다.
우린 버스를 갈아타고 학교로 향했다. 뒤에 남겨진 엄마가 마음에 걸렸지만 곧 잊었다. 일찍 팔아치우고 내가 하교할 무렵이면 벌써 집에 가셨거니 했다. 하지만 버스정류장에서 엄마를 맞닥뜨렸다. 빨지 않아 때가 찌든 고무신에 햇빛에 붉어진 얼굴, 손톱 밑은 새카맸다. 난 외면하고 싶었다. 친구들은 엄마께 인사를 하고 엄마는 내게 양배추 판 이야기를 하셨다. 나는 귀를 막고 그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왜냐하면 엄마의 꾀죄죄한 몰골이 창피했기 때문이었다. 양배추 하나 팔아 빵 한 봉지 사면 딱 맞는 것을 집집이 다니며 파셨다고 한다. 그렇다고 모든 집에서 다 팔아주는 것도 아니었다. 사지 않겠다는 것을 억지로 한두 통씩 떠맡기다시피 했다는 것이었다. 엄마의 수고로움이 애처로웠지만 쪽팔림이 먼저였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엄마의 양배추 팔기는 계속되었다. 본업이 농사인지 장사인지 분간이 안 갈 정도로 팔기에 여념이 없는 엄마, 그 푼돈이 다음날 우리의 차비가 되었다. 난 엄마가 저렇게 고생하시는데 열심히 공부해야지라는 생각보다는 그것을 빨리 그만두기만 바랐다. 친구들이 놀리지도 않았건만 난 놀림이라도 받는 아이마냥 창피했다. 엄마에게 위로의 말 한마디 건넬 주변머리도 없었다. 한 친구는 집집마다 양배추를 손에 들고 팔러 다니는 엄마를 고생하신다며 안타깝다고 말했다. 그걸 듣고 있던 나는 당장 어딘가로 증발해버리고 싶었다. 속상함과 알량한 자존심에 내 가슴은 아래로 한없이 가라앉았다.
나는 여전히 엄마와 같은 공간에서 어정쩡하게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지도 도와주지도 못했다. 그런 내가 못내 섭섭했는지 집에 돌아와서는 왜 엄마를 창피해하냐고 다그치셨다. 나는 어떤 말도 하지 못하고 눈물만 흘렸다. 형편을 뻔히 알면서도 양배추 팔러 다니지 말라는 말도, 그렇다고 엄마 고생하는데 미안하다는 말도 못했다. 입은 얼어붙은 듯 했다. 내 속에서만 온갖 생각들로 마구 소용돌이칠 뿐이었다. 엄마에 대한 죄책감과 구겨진 자존심을 속으로만 되 뇌인 채 밤은 깊어갔다. 가슴에는 가난에 대한 설움만이 똘똘 응어리져 남았다. 그 응어리는 어떤 것으로도 끊을 수 없을 만큼 질긴 실타래가 팽팽히 감겨 있는 것만 같았다. 나는 모든 것이 가난 때문이라고 여겼다.
가을 내내 밥상에는 양배추가 올랐다. 너무 삶겨 홍시같이 물러버린 데다 줄기는 질긴 섬유질이 있어 삼키기도 어려웠다. 아버지는 지게질이 버거우면 때에 절어버린 수건으로 낯을 닦으시고는 망연한 표정이 되었다. 한숨 한 번 쉬고 잎담배를 말아 들이쉬기를 반복하셨다. 독한 연기를 폐 깊숙이 빨아들이고는 코와 입으로 내뿜으며 한숨까지 같이 토해내셨다. 그러다 허방을 짚은 표정을 지으시고는 지게작대기를 짚고 힘겹게 일어나셨다. 울분을 어디 토해낼 데도 없이 그저 꾸역꾸역 속으로 삼키는 것만 같았다.
그런 탓으로 양배추는 먹기가 싫었다. 보기만 해도 부모님의 애타던 모습만 각인될 뿐이었다. 속을 태운 농작물이 어디 양배추뿐일까만 인생살이처럼 농사일도 수학공식처럼 딱딱 들어맞지 않는다. 규칙이 없다. 오히려 엇박자를 놓는 경우가 많다. 무슨 노다지를 캐겠다는 것도 아닌데 우리 집 농사는 목돈 한 번 안겨준 적이 없었다. 부모님이 게을러서도 일머리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비빌 언덕이 전혀 없었다. 이유라면 그것이었다. 이러구러 악다구니처럼 살아지긴 했다.
아리기만 했던 기억으로 쳐다보지도 않던 것에 눈길을 줄만큼 오랜 세월이 흘렀다. 하긴 양배추는 죄가 없다. 어쩌다보니 그렇게 된 것이었다. 이젠 맛있게 먹어주면 그만이다. 지긋지긋하기만 했던 가난이 그리울 때도 있다. 서글펐던 지난날. 내 나이가 딱 그때 아버지 나이가 되었다. 지나면 행복이라고 지난했던 그때가 아슴푸레하다. 사느라고 그러한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