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간의 입원 후 퇴원을 했다. 시댁에서 그토록 원하던 아들을 낳은 것이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니 친정엄마는 미역국을 끓이고 있었다. 수술한 자리에 실밥도 풀지 않은 나는 안방에 들어서자마자 자리에 누웠다. 몸은 천근만근 여기저기가 몸살이라도 난 듯 아팠다. 아들을 낳았다는 기쁨을 느낄 겨를도 없이 어디에 두들겨 맞기라도 한 것처럼 통증이 심해 잠도 들지 않았다. 친정 엄마가 밥상을 들고 왔다. 산후회복을 하자면 혈액순환에 좋은 미역국을 부지런히 먹어둬야겠다는 생각으로 숟가락을 들었으나 도무지 넘어가지 않았다. 병원에서 싱거운 반찬과 미역국을 며칠이나 먹어서인지 당체 입맛이 없었다. 그러면서 예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어느 봄날 저녁이었다. 방문을 열고 들어서니 왈칵 비린내가 났다. 피비린내였다. 엄마가 아기를 낳은 것이다. 그것도 바라고 바라던 사내애였다. 우리 집에 유일한 아들이 태어난 것이다. 여덟 살인 나는 아들이 뭔지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언제인가부터 들어오던 말이 있었다. 친척들이 우리 세 자매를 보면 늘 말하던 ‘하나 달고 나오지’였다. 나는 그 하나 달고 나오는 것이 시장에 가서 사오면 되는 줄 알았다. 까짓 거 하나 사서 달면 그만이지라는 생각에 엄마를 졸랐다. 장에 가서 고추 하나만 사다 달라고 했다. 그럴 때면 난처한 낯빛으로 어린 내게 무어라 대꾸할 말을 잃어버리는 엄마였다.
방안에는 아기를 싼 강보가 있었고, 좀처럼 걸음을 하지 않던 서모할머니가 윗목에서 미역을 꺼냈다. 방바닥은 산후 뒤처리가 완전히 끝나지 않은 듯 했다. 양수인지 오줌인지 알 수 없는 것들이 방바닥에 흥건했다. 난 신기해 아기를 들여다보는데 엄마는 이불을 머리까지 덮어쓰고는 서럽게 흐느꼈다. 또 딸을 낳아 원통함에 우는 울음 같았다. 도무지 어른들의 마음은 헤아릴 수 없었다. 어색하고 난처해진 나는 그 자리를 피해 밖으로 나갔다. 일하러 나간 아버지를 불러와야 했다. 할머니는 얼른 아버지를 불러오라고 성화였다. 나는 역한 피비린내에 비위가 상해 얼른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봄 해는 짧아 벌써 석양이 뉘엿뉘엿 거리는 중이었다. 난 남산 밑 밭으로 달음박질을 쳤다. 아버지는 남의 밭에 밭골을 키고 있었다. 마을 친척 할머니의 밭을 날품삯을 받고 해드리는 일이었다. 이젠 남동생까지 태어났으니 그만큼 아버지의 어깨가 무거워진 것이다. 어쨌든 부모님은 소원성취를 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 시절에 아들이 없다는 것은 재산이 없는 것 보다 더 불안하고 조바심을 내던 때였다. 아들을 낳았다는 내 외침에 아버지는 잠시 미소를 보이더니 집으로 향했다.
딸만 내리 셋을 낳았을 때, 엄마는 늙은 호박을 푹 삶아 먹었다한다. 호박국을 끓인 것이다. 그때만 해도 미역은 귀한 식재료였다. 특히나 산간시골에서는 좀처럼 구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서모할머니는 평소에 표정이 없었지만 그때만은 어른으로서의 인정을 베풀었다. 미역을 한 오리 사 온 것이다. 엄마는 미역국을 먹으며 산후조리를 하는 호사를 누렸다. 그게 다 아들을 낳은 덕분이었다.
하지만 방안의 비린내는 얼른 가시지 않았다. 산모가 먹는 미역국이 밥상에 올라왔고 난 먹을 수 없었다. 먼저 비위부터 상하는 것이었다. 원래가 비위장이 약하고 예민하기도 했지만, 미역국은 산모만 먹는 것인 줄 알았다. 아버지는 귀한 음식이니 먹으라고 재촉했지만, 난 미역국을 먹으려는 찰나 동생을 낳았을 때의 피비린내가 그대로 느껴져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어둡고도 차가우며 질척한 그 방이 동굴처럼 축축하게 되살아났다. 고스란히 각인된 기억 때문인지 난 그 후로도 미역국을 잘 먹지 않았다.
할머니가 첫 미역국을 끓여준 후, 아버지가 미역국을 손수 끓였다. 예전에는 지금처럼 미역이 깔끔하게 포장되어 손쉽게 끓여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미역 한 축이면 꽤 양이 많았다. 돌미역은 지금처럼 바로 끓일 수 없었다. 미역을 한 줌 떼어서 물에 불려놓는다. 그러면 미역의 부피는 열 배는 많아진다. 함지박 가득 미역향이 났다. 종잇장처럼 말라있던 미역은 물에 불리면 부피가 커지고 색깔도 바닷물처럼 변해갔다. 모래가 많았기에 그냥 물에 불려서 끓였다가는 낭패를 당한다. 그것을 바락바락 치대야 미역에 묻은 모래를 털어낼 수 있었다. 아버지는 나름 한다고 했지만 미역을 제대로 빨지 못했다. 그래서 아버지가 처음 끓인 미역국은 모래가 씹혔다.
엄마는 미역국을 무지 좋아했다. 그런 만큼 자식도 많이 낳았다. 난 동생들이 태어날 때마다 엄마가 미역국을 좋아해서 아이를 낳는다고 짐작했다. 그때마다 어김없이 미역국이 밥상에 올랐고, 엄마는 질리지도 않는지 한 달 내내 잘도 먹었다. 어린 내겐 그런 엄마의 식성이 참 신기하기만 했다. 그와는 반대로 난 아이를 낳고도 미역국이 넘어가지 않았다.
미역국은 오로지 들기름과 조선간장만으로 끓였다. 불린 미역을 들기름에 볶고 쌀뜨물을 부은 다음 불을 지펴 무쇠솥에 뭉근하게 끓여낸다. 그러면 그것들이 어우러져 깊은 맛이 났다. 예전에 미역은 짜고도 달았다. 요즘 마트에서 파는 미역과는 비교할 수 없는 맛이었다. 엄마가 동생을 낳고 그렇게 오래도록 미역국을 먹지 않았다면 나도 그토록 오랜 시간 미역국을 거부하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미역국을 제대로 먹지 못했음에도 내 몸은 두 달도 안 되어 출산하기 전보다 더 날씬해졌다. 남들은 비쩍 마른 내 몸을 날씬하다며 부러워했지만, 나는 점점 야위어갔다. 제왕절개 수술 시 마취가 일찍 깨어 반은 의식이 깨어있었기에 그 후유증이 꽤 오래 남았다. 바늘이 내 피부를 찌르는 감각은 오래도록 나를 괴롭혔다. 날씨라도 궂으면 수술자리가 금방 꿰맨 듯 아파왔다. 그 현상이 ‘각성’이고 내가 느끼는 고통이 트라우마라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아들이나 딸이나 생명이 귀하기는 마찬가지인데 지나치게 아들 타령하는 시부모님 때문에 나는 임신 내내 불안에 떨어야했다. 혹시라도 딸을 낳을까 은근히 눈총을 주기도 했고 만삭이 된 내게 시아버지는 막말까지 서슴지 않았다. 심지어는 이혼을 시킨다는 소리까지 들어야 했다. 아들을 낳은 후 더 이상 구박은 받지 않았지만, 내가 낳은 아들이 당신들의 아들인 냥 할 때는 많이 속상했다. 그 때문인지 나는 아들에게 충분한 사랑을 주지 못했다. ‘아들’이 뭐기에 내가 받은 핍박은 너무나 컸다.
이젠 사람들의 인식이 바뀌어 아들 딸 연연하지 않는다. 주어진 생명에 대해 차별도 없어졌다. 참 다행이다. 그 아들이 벌써 20대 중반이다. 아직도 미역국은 내게 많은 것을 떠올리게 한다. 시간이 약이라고 엄마가 남동생을 낳았을 때의 일도 내가 아들을 낳았을 때의 고통도 많이 옅어졌다. 여자이기에 겪어야했고 여자만이 공감할 수 있는 출산의 흔적. 이젠 미역국에 비위가 상하지 않는다. 구수하게 끓여놓은 미역국 한 그릇 뚝딱할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스러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