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 껍질 말린 것을 우걱우걱 씹었다. 겨우내 어린 세 자매의 입을 궁금하지 않게 해줄 간식으로는 감 껍질과 고구마였다. 그것도 아껴먹어야 오래도록 먹을 수 있었다. 들녘에 지천으로 서 있는 그 흔한 감나무가 우리 집에는 한 그루도 없었다. 늦가을 저녁을 먹고 나면 엄마는 남의 집 감 깎는 일을 하러 가셨다. 감을 깎아주고 얻어오는 것은 껍질이었다. 지금이야 껍질에 영양성분이 많다하여 일부러 찾아먹기도 하지만 그때 감 껍질은 좀 사는 집에는 구정물통으로 직행해 쇠죽솥에 넣어졌다. 우린 입에 넣으면 쫄깃하며 달콤하고 말랑말랑한 곶감을 먹고 싶었지만 곶감은 ‘전래동화’에나 자주 등장하는 귀한 것이었다. 어쩌다 깨진 감이 있으면 으깨진 부분을 도려내고 저며 가을볕에 말렸다. 그러면 감 껍질보다는 고급인 감또개가 된다. 그랬기에 단맛도 덜하고 까실까실 억센 감 껍질보다 감또개에 손이 먼저 갔다.
내 고향은 지금도 곶감으로 유명한 상주이다. 그래서인지 밭둑, 논둑에는 감나무가 많았다. 예전에는 감나무에 따로 약도 치지 않고, 거름도 특별히 하지 않았다. 논농사, 밭농사보다 감나무는 덤으로 얻어지는 효자나무였다. 벼 베기가 끝날 무렵이면 생감을 딴다. 기다란 대나무 장대에 칼집을 내어 까만 고무줄로 사이를 벌려놓는다. 그걸 ‘감물끼’라고 하는데 그 감물끼를 감이 열린 가지에 끼워 비틀면 가지가 꺾이면서 한꺼번에 여러 개의 감을 딸 수 있었다. 그렇게 하면 감을 흠집 없이 딸 수 있으며 곶감이 되어도 모양 좋게 상품이 된다. 말린 곶감은 겨울이면 곶감장수들이 골 안으로 찾아들었다. 감을 많이 수확한 집은 곶감 시세가 좋으면 톡톡하니 한 살림 보태게 되었다. 감나무 그루의 수는 곧 그 집의 재력을 상징하기도 했다.
봄이 되면 겨우내 송장 같았던 감나무에도 새순이 돋아나고 오래잖아 감꽃이 피기 시작한다. 노란빛과 흰빛이 어우러진 꽃 속은 벌써 감이 콩알만 하게 얼굴을 내밀었다. 바람이 불어 하나 둘 꽃이 떨어지기 시작하면 강아지풀 줄기를 뽑아 줄을 세웠다. 그걸 엮어 집에 가서 동생에게 주기도 하고 동구 밖을 뛰어다니며 입안을 심심치 않게 해주었다. 이름처럼 꽃은 달싹하며 떫기도 하고 홍시 향이 났다. 감꽃은 아침에 많이 떨어지기에 아침도 먹지 않고 감나무 밑을 순례하듯 뛰어다니기도 했다. 경운기도 흔치 않은 때, 소가 농사일을 하던 시절이라 소가 지나가고 나면 소똥이 철퍽철퍽 길 한 가운데를 점령했다. 감나무 밭은 따로 화학비료를 하지 않고 소똥으로 거름을 주기도 하여 감나무 밑에는 늘 소똥무더기가 많았다. 해가 쨍쨍한 날은 마른 소똥 위에 살포시 내려앉은 감꽃을 줍기도 했다.
염천더위가 물러가고 가을을 알리는 바람이 시원해짐을 느끼기 시작하면 시퍼런 감들 사이에 이따금씩 발그레한 선홍색 홍시가 보인다. 그것을 따면 백발백중 제대로 익지 않고 홍시 속에 흰 쌀벌레 비슷한 것이 한 마리 기어 다녔다. 감 벌레였다. 먹을 것이 궁해진 우리는 그 벌레 먹어 새카만 부분은 떼어내고 쭉 하고 홍시 알맹이를 빨아먹었다. 몇 개를 따먹고 나면 입가는 벌그레하게 홍시가 묻었고, 소매로 쓱 문지르면 소매 끝은 콧물, 감물이 범벅이 되어 반질거렸다. 홍시 묻은 옷은 빨아도 감물이 배어 지워지지 않았다. 동네 아이들은 얕은 곳은 감나무를 타고 올랐고, 높은 곳은 감물끼를 가져와 홍시 따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것으로 허기진 배를 채웠다.
이사를 하고부터는 곶감을 맛볼 수 있었다. 그 집에 감나무가 한 그루 있었기에 가능했다. 아래채 뒤주간 뒤에 둥시 나무는 심은 지 얼마 되지 않아 키도 작고 감도 몇 개 달리지 않았다. 대신 마당 안에 있는 따바리 감나무에는 감이 제법 많이 달렸다. 겨울이 깊지도 않았는데 바람이 몹시 불고 때 이른 흰 눈이 펑펑 쏟아지던 날이었다. 감나무 주인인 큰집에서 감을 따갔다. 우리 마당에 서 있는 감나무에 달린 감을 따가는 사촌언니를 나는 의아하게 바라봤다. 어린 내가 보기에는 우리 마당에 심겨져 있으면 우리 것이라 생각했지만 어른들은 아니라고 했다. 저렇게 추운데 눈 맞으며 고생하지 말고 그냥 우리 따먹으라고 하면 될 걸 큰집에서는 야박하게도 감나무에 감을 하나도 남겨두지 않고 따갔다.
나는 엄마에게 항의했다. 왜 우리 집에 달린 감을 따 가는데 강 건너 불구경 하듯 가만히 있느냐는 것이었다. 엄마는 무안해진 얼굴로 무언가를 말씀하시려다 곧 그건 큰집 것이라고 하셨다. 사실 그 감나무는 곶감으로 말려도 상품가치가 없는 것이었지만, 워낙 먹을 게 귀한 시절이다 보니 인심도 야박할 수밖에 없었다. 나중엔 우리 집도 논, 밭을 장만하여 품종 좋은 감나무가 여러 그루였기에 홍시조차도 따먹지 않을 만큼 그 감나무는 천덕꾸러기가 되더니 결국 베어 없어지게 되었다.
난 이제 감 종류는 잘 먹지 않는다. 특히 돈 주고는 절대 사먹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랄 때 먹을 게 없어 질리도록 홍시를 따먹었기 때문이다. 허기를 채우기 위해 설익은 감을 따 먹은 적도 있다. 반만 겨우 익은 감은 무지 떫고 썼다. 너무 떫어 혓바닥이 뻣뻣했다. 그렇게 설익은 감을 몇 개 먹으면 변비가 심해져 볼일도 못보고 고생을 했다. 부담을 받은 위에서는 신물이 자꾸 올라왔다. 자다가 신물이 올라오면 속이 무척 쓰렸다. 잠결에 입안에 고인 신물을 다시 삼키기도 했다.
그랬기에 이제 감이라면 넌더리가 난다. 명절이 다가오면 마트나 시장에는 온갖 종류의 감들이 포장된 채 주인을 기다린다. 난 거기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아무리 도도한 품격으로 때깔 좋게 자태를 뽐내고 있어도 고개를 홱 돌리고 지나친다. 감이란 놈과 무슨 철천지원수라도 된 듯하다. 남들은 그런 나를 참 별스런 사람으로 본다. 하지만 그건 나 자신도 어쩌지 못하는 일이다. 아마 감 깎을 때 나온 끈쩍끈쩍한 감물에 질려버렸는지도 모른다.
감나무가 여러 그루가 생겨 부자가 된 기분도 잠시, 겨울밤은 밤늦도록 감을 깎아야했다. 손이 시리고 손가락과 손목이 아파와도 깎아야할 감은 태산 같았다. 손은 아무리 씻어도 감물이 들어 지워지지 않고 새까맸다. 손톱 밑까지 감물이 들어 손톱에 때가 낀 듯 불결해보였기에 늘 손을 감추어야 했다. 지긋지긋하던 감 깎기는 고등학교 졸업과 함께 그만두었다.
엄마는 나무에 주렁주렁 달려있는 감이 아까워 지금도 수확을 하신다. 아버지 돌아가신 후 감나무는 가지치기할 사람이 없어서 키만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있다. 높지 않은 곳에 달린 감은 나무 밑에 포장을 치고 대나무 장대로 흔들면 감이 후두두둑 떨어진다. 밖으로 튕겨 나가는 놈, 깨지는 놈, 멀쩡한 놈이 수북하다. 그중 멀쩡한 놈만 골라서 박스에 담아 손수레에 실어 나른다. 그렇게 따놓고도 위를 쳐다보면 아직 반 넘게 남아있지만 어쩔 도리가 없이 내버려둔다. 그 감을 엄마는 아직도 직접 깎으신다. 기계의 손을 빌리지 않는 이유는 맛 때문이란다. 껍질 벗긴 감이 차이가 나면 얼마나 난다고 고집을 꺾지 않으신다. 우린 힘들게 하지 말고 나무 째 넘기든지 그냥 포기하라고 하지만, 곶감을 만들어놓으면 제법 쏠쏠하게 목돈도 생기고 늘 해오던 것인지라 아까우신 모양이다. 그렇게 감 깎기를 한 달 가까이 하고나면 몸져누우신다. 그 일은 해마다 반복된다.
곶감 만들어 얻는 돈과 몸 아파서 쓰는 병원비 생각하면 헐값이라도 나무 째 넘기는 것이 훨씬 이득이지만 노인네 고집을 꺾을 수 없다. 바로 곁에서 사는 것이 아닌 바에야 일일이 신경 쓰고 간섭하는 것도 무리이긴 하다. 김장 무렵이 되면 처마 밑에는 깎아놓은 감이 발그레하게 선홍색을 띠고 겉은 쫄깃하고 안은 홍시가 된다. 완전한 곶감보다 오히려 맛은 더 좋지만 그것을 하나 따서 입에 넣을 궁리를 하지 못한 체 그냥 바라보기만 한다.
그것조차 싫어할 입은 아니지만 언제부터인지 거북스러웠다. 어쩌면 아까워서인지 모른다. 하나하나 온몸의 관절이 닳을 대로 닳아버린 몸으로 한 푼 마련하겠다고 밤새 감을 깎는다는 사실을 알기에 더 주저된다. 감을 깎는 일은 고행의 길인 것만 같다. 감물이 들어 끈적이고, 미끈하고, 축축하고, 뻣뻣한 장갑은 이제 그만 버렸으면 좋겠다. 아직도 내 손가락 마디는 아프다 못해 무감각해지고 등줄기가 저려오는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