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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있는 아파트 단지에 올 해 87세 되신 할아버지가 한 분 계신다. 2년 여 동안 틈 나시는데로 나를 찾아 와 한 두시간씩 머물다 가시는데, 자식들한테서 돈이 조금 오면 제일 먼저 찾아 와 점심 식사 같이 하러 가자고 하신다. 어떨 땐 할아버지가 점심값을 내고, 어떨 땐 내가 산다.
할어버지의 대화 레파토리는 매번 비슷하다. 한 번 하셨던 얘기를 하고, 또 하시고 하여 이젠 전부 외워 버렸지만 얘기를 하시는 동안에는 그 얘기 전부 다 알고 있다고 절대 내색을 안 한다. 할아버지가 혼자 계시니 외롭고, 또 치매예방책으로 하시는 말씀인 줄 잘 알기 때문이다.
열 아홉살에 결혼을 했으며 스무 한살에 경찰이 되었다가 6.25사변을 맞았는데 1.4후퇴 때 부산까지 피난 갔었던 얘기, 휴전 후 모래 팔아 벼락부자가 되었으며, 벽돌 공장을 세워 정말 많은 돈을 벌었고 땅도 많았으나, 작은 마님을 보았고, 작은 마님과의 사이에서 아들 딸 둘을 보았는데 어느 날 집까지 팔아 다른 남자를 찾아 가 버렸다는 얘기, 젊었을 때 번 그 많은 돈을 조카에게 속아 전 재산 다 날리고 경제사범으로 감옥까지 갔다 온 얘기, 지금은 국가 유공자 혜택과 본 처와의 사이에서 난 아들, 딸들로 부터 도움을 받으며 혼자 외로히 살고 있다는 얘기들이다.
겨울 동안 추워서 꼼짝을 안 하시더니 봄이 되니 슬슬 나오신다. 나에게 '봄이 오는 소리'는 사무실을 들어서는 할아버지의 기침 소리다. 겨우내 집안에만 계셔서 그런지 다리에 영 힘이 없다. 얘기를 마치고 일어 설 때도 한 번에 일어 서지 못하고 부축을 해 드려야 겨우 바로 서실 수가 있다.
지난 해에는 돌보미 할머니를 구해 주5일을 방문하여 반찬 만들어 주기, 집안 청소, 시장 같이 보기, 병원 같이 가기 등을 시켰었는데 고마워 하셨다. 올 해도 또 시도해 볼 참이다.
할아버지를 보면 인생은 그야말로 구름같다는 생각이 든다. 과연 일장춘몽이다.과거의 영화가 모두 구름처럼 흘러가 버렸다.
가고 나면 그만인 인생, 아옹다옹 살 필요가 없다는 걸 할아버지를 보고 느낀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는 알지만 실천하기란 참 어렵다. 먼 훗날 내가 가야할 때 나는 사랑하는 가족들과 이웃들에게 웃으며 작별을 고할 수 있을까?
다만, 내가 가고 난 다음 나와 관계되는 모든 사람들에게 '보고 싶은 사람',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
그저께도 같이 점심먹으러 가자고 하셨는데 내 단골 식당으로 모시고 가 돼지고기 두루치기에 된장국을 참 맛있게 드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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