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부터 시작된 설사의 후유증으로 기운이 없어 자전거도 타러 가지 못하고 아침부터 침대에서 뒹굴 거립니다. 한 번 라이딩 나가면 간단하게 타도 70~100여 km는 타야 하니 동료들 따라가지 못해 민폐를 끼치는 것이 싫습니다. 아니 뒤처진다고 놀려대는 놈들이 있을까 봐 더욱 못 나갑니다. 다음다음 주면 자전거 타고 속초 회 먹으러 가는 날인데 제가 생각해도 지금 몸 상태라면 무리일 것 같습니다. 속절없이 천장만 쳐다 봅니다.
어제 금요일 저녁 성당 레지오 모임 갔다가 4년, 7년 전 모임에서 탈퇴한 옛 단원들이 두 명이나 복귀하여 같이 술 한잔 했습니다만 저는 맥주를 병아리 눈물만큼만 마셨습니다. 즐겁게 마음껏 먹고 싶었지만, 혹시나 또? 하는 두려움에 아예 마음을 비우기로 합니다. 세상엔 왜 따뜻한 맥주가 없는 걸까요?
성당 레지오란 성당에서 영세를 받은 사람들이 매 주 한 번씩 모여 기도도 하고 봉사활동도 하는 모임입니다. 성당에선 신자들이 술 먹는 것을 금하지는 않기에 가끔 회합 끝나면 한 잔씩하곤 하는데 보통 11시 경이면 일어섭니다. 이날은 12시 가까이 되어서야 마쳤습니다. 괴롭더군요. 술 참느라.
오전 열 시경, 학원가는 막내딸이 오후에 제빵제과 재료 사달라고 합니다. 베이킹이 취미거든요. 실력도 제법이랍니다. 집안 식구들 생일이면 생일 맞는 가족의 주문을 받아 원하는 종류의 케이크를 구워주곤 하지요. 저는 호두 파이를 좋아 합니다. 3시 반 학원 끝나면 성당에서 만나자고 약속을 한 후 막내딸은 학원으로 가고, 저는 성당으로 가서 장구 연습을 합니다.
요즘 '삼도 사물'을 연습하는데 가락보 외우기가 만만찮습니다. 타법도 힘듭니다. 사물놀이 고수님들은 단순 가락만 치면 재미없다고 온갖 어려운 가락들을 다 모아 놓은 것이 삼도사물 가락입니다. 초보는 ‘영남농악’, 중급은 경기지방의 ‘웃다리’, 상급은 영남, 호남, 경기 지방의 풍물 중 중요한 가락들만 뽑아서 만들어 놓은 ‘삼도 사물’을 배우는 게 이 동네 관행이지요. 꽹과리나 장구 치는 속도도 빨라야 하니 오로지 연습만이 지름길입니다.
세 시간 넘게 연습을 한 후 성당으로 온 막내딸을 만나 대치동에 있는 제과제빵 기구 등을 파는 가게로 갔습니다. 막내딸이 필요한 건 스승의 날 담임선생님께 구워 드릴 제과제빵 재료들과 포장용지입니다. 과자 밑에 놓을 종이, 무슨 보자기 같은 것도 모두 이름이 프랑스어로 되어 있습니다. 더구나 빵이나 과자 이름을 잘 알지도 못하는 저는 그저 물건 사기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가 계산하고 빨리 집에 갈 생각뿐입니다. 막내딸이 주인에게 이거저거 가격 물어보며 고민을 하기에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과자 밑에 까는 종잇값이 너무 비싸다는 겁니다. 신문지에 싸면 안 되느냐고 했더니 주인과 가게 안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한바탕 웃어 제쳤고, 막내딸은 홍당무가 되었습니다만 그 바람에 흥정이 쉽게 끝난 것 같습니다. 주인이 좀 싸게 해 준 모양입니다. 조개처럼 생긴 빵틀도 선물로 하나 얻었고요. 버터나 휘핑크림 등 나머지 재료들은 가락시장 마트에 가서 샀습니다. 여기는 대형 할인점보다 20~40% 더 쌉니다. 아는 사람들은 대형 할인점에 가지 않을 것입니다.
집으로 돌아오는데 큰 사위에게서 전화가 옵니다. 집 안 청소 중 아파트 천장 배관 파이프 있는 곳에서 쥐똥 냄새가 나는 것 같은데 사위가 제일 무서워하는 동물이 ‘쥐’라면서 저보고 쥐똥 좀 치워줄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큰 사위네가 사는 집은 이미 재건축으로 허가가 난 오래된 저층 아파트인데 배관 검사구가 천장에 달려 있거든요.
저도 세상에서 쥐가 제일 무섭습니다. 대학 1학년 시절 셋방에 살 때, 여름날 모기장 안으로 들어온 쥐가 발가벗고 자는 총각 가슴을 타고 오르는 바람에 고래고래 비명 지르다 밤새 한숨도 못 잔 기억이 있습니다. 모기장이 안으로 눕혀져 있으니 쥐가 밖으로 나가지를 못해 저는 책상 위에서 의자도 던져 보고 아령도 던져 봤지만 헛일이었습니다. 책은 던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책상 위에서 어렵게 모기장을 찢어가며 다 걷어 내고 이불을 건져 올린 다음에야 한 마리가 나가길래 이제 제놈 갈길을 갔는가 했습니다만 이불 속에 또 한 마리가 더 남아 있는 바람에 제 비명에 다른 사람들을 깨우기도 했었지요. 또 어른이 된 후,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소변 보는데 생쥐 한 마리가 다리 밑으로 지나가는 바람에 놀라 바지를 적신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정말 무섭다고 엄살 부리는 큰 사위를 도와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만약 큰딸이 이 사실을 알았다면 온갖 소리 다 하면서 자기 집에는 무섭고 더럽다며 죽어도 안 갈 테니까요. 다 치울 때까지 우리 집에 눌러앉아 있을 것이 눈에 훤히 보였기 때문입니다. 사실 큰딸이 가끔 부리는 신경질과 제 엄마와 티격대는 소리는 지켜본 사람만이 그 고충을 압니다. 막내딸은 이런 큰 언니를 '신경질쟁이'라 하여 작은 언니보다 조금 덜 좋아합니다. 하지만 백화점에서 물건 살 때는 필요한 것 없느냐고 저한테 문자나 카톡으로 꼭 물어 옵니다. 자전거 용품들이나 영양제, 오메가-3 등은 해외에서 구매해 주기도 하는 고마운 큰딸이지요.
막내딸을 집에 데려다 주고 다시 100여 미터 떨어진 사위네로 갔더니 아니나 다를까? 천장 배관구 안에서 쥐똥 냄새가 심하게 나고 있었습니다. 겨우 머리를 들이밀어 살펴보니 그곳은 바로 쥐들의 화장실이었습니다. 기겁하는 사위는 저 멀리서 구경만 하고 할 수 없이 제가 바짝 마른 쥐똥을 하나하나 줍기도 하고 쓸어 내기도 했습니다. 천장 배관구 구멍이 너무 작아 머리를 먼저 넣은 다음 팔을 넣어야만 했습니다. 너무 어두워서 플랫시를 켜야 했으며 냄새가 지독하여 수건으로 코를 싸매고 숨을 참아가며 조금씩, 조금씩 치웠습니다. 구석구석 멀리까지 흩어져 있어 치우기가 여간 까다롭지 않습니다. 스티로폼으로 쥐구멍까지 꼼꼼히 막고 나니 무려 두 시간 동안 아마 밥 세 공기 분량은 쓸어낸 듯합니다. 사위는 두 공기쯤 되겠다고 합니다. 밥 먹을 때, 사위는 수북이 퍼먹고 저는 깎아서 2/3만 먹거든요.
땀이 범벅되었습니다만 페스트가 염려되어 얼굴을 닦지도 못합니다. 이러다 혹시? 하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만, 아파도 내가 아픈 게 낫지 하며 마지막 걸레질까지 깔끔하게 마쳤습니다. 사위랑 약속합니다. 큰딸한테는 이런 사실 절대 비밀이라고. 사위도 흔쾌히 동의합니다.
집으로 돌아와 때수건으로 온몸을 빡빡 씻은 후 피우는 담배 맛도 찝찝했습니다만 뒤따라 저녁 먹으러 온 사위랑 마시는 쏘맥은 정말 시원하고 맛있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손자랑 대공원에 놀러 갔다 온 큰딸은 쫑알쫑알 재잘재잘, 저녁 잘 먹고 무사히 집으로 갔습니다. 이렇게 또 하루가 저물어 갑니다. 행복이 뭐 별거 있나요? 가족들이 편안하고, 쉬는 날 얼큰하게 취해 미소 지으며 편안하게 잠들면 그게 행복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