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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사랑 순님이    
글쓴이 : 이창원    15-07-06 22:38    조회 : 6,744
첫사랑 순님이
 
 저녁 먹을 때가 좀 지난 시각, 옆 단지에 사는 큰딸이 급히 왔다. 초등 3학년인 손자 녀석이 자기 친구 집에 놀러 갔는데 같이 데리러 가자고 한다. 그 아파트까지는 거리가 제법 있는 데다 어둑어둑해져서 별 수없이 차를 끌고 같이 갔다. 8시까지 데리러 가기로 한 모양이었다. 손자 친구네 집 앞에 주차를 한 후 큰딸이 손자를 데리러 들어갔으나 손자 녀석은 태평스럽게 저녁을 먹고 있으니 밖에서 기다리라고 한단다. 차안에 앉아 30분이나 기다렸다. 그런데 그 친구가 여자애다. 친구의 부모가 손자를 좋아해서 가끔 놀러 가서 저녁을 먹는단다. 그 여자애도 우리 집에 놀러 오기도 하고 밥을 같이 먹기도 했었단다. 우습기도 하지만 뭐라고 꾸짖을 일도 아니라서 다 먹고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손자의 지금 모습을 보니 어릴 적 내가 여자 친구와 놀던 생각이 났다.
 
 내가 초등학교 입학 전이니 대 여섯 살 때쯤인가 보다. 이웃집에 동갑내기 여자 친구가 있었는데 이름이 ‘순님’이었다. 우린 눈만 뜨면 둘이 같이 붙어 있었고, 밥도 같이 먹고 때론 잠도 같이 잤던 것 같다. 저녁 때 헤어져야 할 시간이 오면 같이 있겠다고, 더 놀겠다고 서로 울며 꼭 안고 놓지 않았던 기억도 난다. 그러다가 공무원인 아버지를 따라 순님이는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에 다른 도시로 이사를 가 버렸고 난 까맣게 잊어버리고 살았다.
 
 고등학교 3학년 여름 어느 날 저녁을 먹고 난 후 잠시 쉬기 위해 담장 위에 올라 앉아 골목길을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골목 끝 저만큼에서 걸어오는 여학생, 난 바로 순님이라고 직감했다. 며칠 전 순님이 어머님이 참으로 오랜만에 우리 집에 왔다가 순님이 아버지가 다시 고향으로 발령을 받아 왔다는 얘기를 했었고, 나를 보고는 순님이도 고3이라고 얘기를 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순님이도 내가 궁금해서 낮에 우리 집 주위를 혼자 돌아 봤다는 것이었다.  우리집은 옛날 그 위치, 옛모습 그대로였었다.
 
 반가운 마음에 담장에서 펄쩍 뛰어내려 순님이 앞에 섰다. 깜짝 놀란 순님이는 이내 나를 알아보고는 해맑은 얼굴에 환한 미소를 지으며 ‘놀랐잖아예, 잘 지냈어예?’하고 인사를 했지만 갑자기 나오는 순님이의 존댓말에 난 말문이 막혀 버렸다. 동갑내기 순님이가 나한테 존댓말을 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었다. 나도 존댓말을 해야 하나 순간 당황스러웠다.
 
 얘기를 주도한 것은 순님이었다. 난 그저 고개를 가로 젓든지 끄덕이든지 하는 게 전부였으니까. 대학을 어디로 갈 거냐고 물었지만 난 그저 막연하게 고향에서 제일 가까운 대도시 대구만 생각났었다. 사실 다른 도시는 많이 가 본적도, 잘 알고 있는 도시도 없었다. 대학도, 또 어떤 학과를 갈 것인가 하는 건 생각지도 못했었다. 아니 아예 대학에 무슨 학과가 있는지 조차 잘 모르는 상태였다. 막연히 대학에 대한 동경만 가지고 무작정 공부만 하고 있었으니까.
 
 순님이는 교육대학을 갈 거라고 했다. 선생님이 될 거라고 했다. 부러웠다. 도시에서 살아 얼굴도 하얗고 아는 것도 많고 공부도 잘 하는구나 생각했다. 난 더욱 더 움츠러들었다. 지금 생각해도 하얀 얼굴, 해맑은 미소, 얘기 도중 한 번씩 밝게 활짝 웃는 모습이 정말 예뻤다. 용감하게 뛰어 내린 호기는 어디로 가고 더욱 더 창피하고 부끄럽게 여겨지는 걸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생각해도 참 바보스러운 나였다.
 
 어릴 때 우린 결혼을 약속했었다. 우리 서로 다른 사람과는 절대 결혼하지 않겠다고 굳게굳게 맹세 했었다. 양가 부모님들과 형제들이 그 사실을 모두 다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날 그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냥 대학 진학 후 만나자는 말 밖에 할 수가 없었다. 아니 만나자는 약속보다는 우선 좋은 대학 잘 들어가라고 인사치레 말만 할 수밖에 없었다.
 
 그 후 순님이를 만난 건 서로 결혼을 하고 나서였다. 1980년 9월 대통령 취임식 날, 공휴일로 선포되어 회사도 쉬는 터라 집사람과 딸을 오토바이 뒤에 태워 고향 집에서 가까운 대통령 생가를 찾아 갔었다. 워낙 시골인데다 비포장 흙길이어서 비온 뒤 시골 농로에 물이 빠지질 않고 있었다. 도랑 넘고, 개울 건너 용감하게 전진을 했지만 생가까지는 가보지도 못한 채 오토바이가 물에 잠겨 시동이 꺼졌고 시동은 다시 걸리지 않았다.
 
 전기 플러그가 마를 때까지 옆 언덕 위에 올라 쉬고 있는데 순님이가 내 딸보다 더 큰 딸의 손을 잡고 걸어오고 있었다. 틀림없는 순님이었다. 그 때 내 딸은  겨우 아장 아장 걸을 때였지만 순님이 딸은 혼자서도 잘 걷고 있었다. 서울에서 대학을 다닌 순님이 오빠로부터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은 있었지만 결혼까지 하고 그 상대가 고향 사람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었다. 날 의식했는지 고개 숙여 딸만 쳐다보며 도란도란 얘기하면서 지나갔다. 나도 멍하니 쳐다만 보고 있었다.
 
 그 이후로 순님이를 보지 못했다. 어떻게 살고 있을까? 지금은 어느 하늘 아래서 나처럼 늙어 가겠지. 나처럼 머리도 희었을까? 예쁜 얼굴에 주름살은 생겼을까? 손자 녀석을 보면서 불현듯 어릴 때 첫사랑 순님이가 생각나는 건 또 왜일까? 나도 나이 들어 가는 증거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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