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비는 오고
1960년대-70년대,한
집안에 여자만 4명이
살고있으니 경제력이 말이 아니었다.
외할머니와 어머니가 집안을 이끌어 오셨고,나와
여동생은 세상모르면서 커왔고 살아나왔다.
집안에서는 가난하고 누추한것은 그다지 아프고
싫은 느낌은 없었다. 그러나
학교를 가게되면 친구와 금방 비교가 되니 둔한 나도
뭔가 느낌을 받게 되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건 점심시간이다.도시락을
열면 싸래기 밥인데 죽같이 생겨 그게 친구들앞에
내놓기 싫어 도로 집어넣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손도 대지 않고 그대로 가져간 싸래기밥 도시락을
보신 어머니는 걱정스레 나에게 물었다.
' 점심도 안먹고 배고프지 않느냐?'
나는 철없이 대답했다.
'응 수돗물 마셨어'.
지금 같으면 꾀를 내어 다른 대답을 했을것인데
어린게 그런 철이 없었다.
어머니 심정이
어땠을까?....
지금 생각하면 그
싸래기 밥이 영양의 보고이다.
쌀눈이니 비타민B1,B2
이런것들이 집약되어 있는게 아닌가 말이다.집에서는
죽같은 그 싸래기밥을 먹었어도 친구들앞에서는 싫었던
것이다.
초등학교 5학년
봄소풍때로 기억한다. 봄소풍
가는 그날은 외할머니가 '김밥'을
사주셨다. 얼마나
의기양양하게 그 김밥을 들고 갔던지!
그런데 그날 비가 왔다.
소풍은 중단되고 모두들 사온 소풍도시락을 내놓고
교실에서 먹었다. 나도
떳떳하게(?),으쓱해서
그 김밥을 내놓고 친구들과 함께 먹었다.
내혼자 먹었다기 보다 많은부분 친구들에게
나눠주며 먹었다. 소풍을
안갔으니 집에도 일찍 돌아갔다.
외할머니는 소풍을 안가고 일찍 집에 돌아온걸
보시고는 '김밥'은
어쨌느냐?고 물으셨다.
나는 아무 생각없이 '친구들과
나누어 먹었어'라고
답을 했다. 아무생각없는
나의 답변에 '어린동생이
집에서 먹지도 못하고 있는데 집에 갖고와서 동생하고
나눠먹지, 동생이 그
김밥을 얼마나 먹고싶어 하는데...'라고
하시는 말씀이 내 마음에 파장을 만들며 작은 조약돌처럼
핑핑 날아갔다.
집안에 어머니가 보이지
않았지만 철없는 나는 잘 몰랐다.
그런데 사건이 터지고야 알았다.
외할머니가 장물인 쌀을 싸게 샀고 경찰서에
불려갔다. 경찰서에서
집안의 다른 사람을 부르려 하니 어른이라고는 아무도
없고 어린아이 둘만이 있었던것이다.
어머니가 거제도의 어느 부농집에 시집가는 대신
쌀을 우리집으로 꼬박꼬박 보내주기로 했다는 약속을
하고 가셨다는 것을 그 난리스런 상황속에서 버썩 마른
낙엽같이 알게되었다. 철없는
시기였다.
어머니는 자신의
어머니인 외할머니가 경찰서에 붙잡혀가고 어린
자식들은 집에 덩그러니 남고 하는 이난리가,
살자는 짓인지, 잘하는
짓인지, 뭔지 도무지
판단이 잘 안되었다고 탄식속에 흘리셨다.
죽기 아니면 살기다.
어머니는 우리 곁으로 돌아오시어 천막을 치고
장사를 시작했다. 한국경제도
조금씩 조금씩 활기를 띄는것이었는지 장사도 조금씩
되어갔다. 비가오면
천막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요란하고 시끄럽다.
어머니의 날개는 늘 비에 젖어 하늘을 날아오르지
못했다. 그 날개밑에서
어린 자식들은 비를 피하고 있었다.
침침하고 눅눅했다.그래도
따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