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살고 있는 도쿄
오오타구는 한국으로 치면 경인공업지구의 어느 한
귀퉁이인데,특히
영세가내공업이 발달되어있다.
내용은 잘모르지만 금속을 다루는 여러가지
공장들이 우리집부근에 많이 있다.일본의
금속기술은 세계수준이어서 미국의 우주항공센타
'나사'에서도
주문이 오고, 이곳의
영세가내공장들이 주문을 받아 납품한다고 한다.
금속을 다루는 기술은
그 원조를 따져보면 우리 한반도였지.
일본에 철을 전해준것도 우리 한반도 아니였던가?!
중학교 역사 교과서만 펼쳐봐도 나온다.
우리집에는 한국의 중학역사교과서가 출판사별로
6권이나 있다.
또 딸내미가 고등학교때 사용했던 일본사 교과서를
친정집에 한권 남겨두고 시집갔는데,
한.일 두 교과서에도
이 '가야철'
얘기가 나온다. 한국의
중학교 역사교과서는 가야토기와 일본의 오사카에서
출토된 스에키(토기),그리고
전투할때입은 판갑옷과 투구가 총천연색 사진으로
나와있어 고대 철을 둘러싼 반도와 열도의 교류관계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일본의
역사교과서는 고등학교 책이라 그런지 그림도 흑백에다가
활자도 작고 읽으려면 부담부터 온다. 그래도 관심있는 부분이라 차근차근 읽어보는데,
'대륙문화의 수용'이라는
제목아래 조선반도에서 건너온 '도래인'이
철기,토기생산,직물짜기,금속공예,토목등의
기술을 전해주었다는것.
한자.이두의
사용으로 일본인 이름,지명
표기가 가능했다는것,또
한자를 사용하여 야마토정권의 기록.출납.외교문서
작성에 도래인들이 종사했다는것.
이런 지식과함께 불교.유교,醫.易.曆등의
학술도 전래받았다는것을 적고있다.고대
일본은 철생산이 안되었고,가야는
철생산이 유명했던 나라로 고대 해상무역을 연결해주며
발전했던 중요한 나라였다.
그리고 통일신라시대로 들어와서는 금속기술은
더욱 발전한다. 이까지는
교과서를 펼치면 얻는 지식이다.
교과서가 아닌 현실세계,
그러니까 내가 살고 있는 오오타구에는 많은
재일동포들이 살고있다.
그들의 다수가 고물상에 종사하며 삶을 영위해
왔는데, 일본인들의
금속공장들에서 나오는 쇠부스러기를 모아서 사업을
운영해온것이다.가야와
통일신라등의 옛영광을 생각해보니 기막힌 현실이다.
과거 어쩌다가 우리가 일본의 식민지로 떨어져
여기 동포들이 일본 금속회사 쇠부스러기를 주워모으는
고물상으로 삶을 운영하고 있는가?!(고물상
노동자체를 비하하는 말은 물론 아니고)
오오타구 하네다공항
근처에서 고물상을 하는 재일동포 1세분들이
전기회사의 놀고있는 땅을 빌려 고추,상추,깨잎등
고향의 음식이 그리워 재배하는 작은 밭이 있었다.
요즘의 도심농장의 원형이다.
그곳에서 나의 중매얘기가 나왔다.
'즈키다
아주머니, 한국에서
오셨으니 좋은아가씨 있으면 우리집에서 일하는 총각한테
소개하소'
'즈키다' 고물상집에
재혼하여 가신 한국아주머님에게 '안도우' 고물상
할아버지가 앞으로 내 남편될 재일동포 2세의
중매부탁을 하고계신것이다.
'즈키다'는 일본식으로
바꿔부르는 것이고,한국성은
박씨이다.' 안도우'는
한국안동을 일본식으로 부르는것이다. 안동권씨 할아버지였다.
그 아주머님은 일본에
오라버님이 계시어 그 연줄로 일본의 재일동포에게
재혼으로 가신것이다. 그
아주머님은 한국의 우리동네에서 오랫동안 어머님과
함께 언니동생하며 지내시던 분인데,그
결혼중매부탁을 듣고 날 떠올렸다.
결혼얘기는 급물살을
탔다. 신랑측에서
한국으로 나와서 우리를 만났고,
말도 통하지 않는 우리는 부산 용두산 공원
부산타워에서 데이트하면서 나는 일본으로 시집가기로
정했다.
어머니는 가라,가지마라
말을 못하시고 '니알아서
결정해라'고 하셨다.
딸을 아무도 없는 물건너 일본으로 보내자니
막막했고,그렇다고
나이 들어가는 딸을 집에 묶어 두고 있기도 막막했을것이니
니알아서 하라고 할수밖에.
무슨 운명이라고나
하듯이, 널 임신했을때
날마다 뱀이 나타나 죽이고 또 죽이고 했지만 살아났었는데,
하루는 바구니에 담아서
강물에 띄워 보냈더니 그후로 안나타나더라...넌
물건너 갈 팔자인가 보다,그렇게
운명으로 합리화 시키며 마음을 가라앉히시는것 같았다.
일본으로 떠나오던
한국의 공항에서 젊은탓일까?
미지의땅에 대한 불안보다는 기대반 용기반이었다.
어머니는 '
니가 대학공부하려고 그렇게 해봤지만 못했으니
일본으로 유학간다고 생각해라'고
하시며
나이들면 다시 한국나와서
살자고 모녀간만의 희망을 말씀하셨고,
함께 마중나온 어머니 친구분은
일본까지 가는 내가
안쓰러웠을까? 자신이
살아오며 깨친 인생의 귀한 말씀을 해주셨다.
'서로
불쌍하며 여기며 잘살아라'
1985.8.27서로
말도 통하지 않는 나의 남편 재일동포2세가
나리타공항에서 수줍은듯,반가운듯
나를 맞이햇다.
나는 그렇게 하늘을
날아, 바다를 넘어 저
밑바닥에서 자신의 일에 성실히 땀흘리는 사람을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