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3세
딸내미는 일본친구들과 어울리면서 자라나와 소학교에 들어가게 되었다.
보육원 근처에 일본소학교가
있다. 이 지역의
어린이들이 모두 이학교에 들어간다.
잠시 멀리 위치한
신주쿠의 한국소학교를 떠올려 봤다.그러나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차를 두번 갈아타야 하고 내려서도 버스를
타야하는 먼길이다. 가장
중요한것은 아이의 편리함,그리고
보육원에서 쌓아온 친구들과의 우정이었다.
한국학교가 아닌
일본학교에 아이를 보낸 나는 재일2세
아빠가 갖지않는 고민을 갖고있었다.
일본학교속에서 내 혼자해야하는 남모를 고민...그
고민을 꿈으로 엮어서 가정방문 온 담임선생에게
얘길했다.
'에이꼬를
한.일을 잇는 무지개같은
존재로 키우고 싶습니다'
담임선생님은 별 반응없이 그냥 듣고만 있었다.
나의 일본어가 부족했던 것이었던지.
일본은 봄방학이 길다.
봄방학이 되면 나는 에이꼬와 함께 한국친정나들이를
했다. 나는 어머니와
형제가 있는 조국과 고향을 찾아가는 반가움과 기쁨의
여행이었고,에이꼬에겐
뿌리를 느끼게 할수있는 여행이 되기를 간절히 바래는
기도였다.그래서 우리의
여행은 자연이 소생하는 봄,
반가움과 설렘의 봄,
간절한 기도의 봄,
그야말로 봄,봄,봄
...노래하며 떠나는
여행이었다.
에이꼬가 초등학교
저학년,아마 2,3학년때,
동생들이 살고있는 서울로 갔다.
무슨 일때문이었는지 기억은 안나지만,나와
에이꼬 둘이서 서울시내를 돌아다닐 일이 있었다.
에이꼬가 길을 걷다가 넘어져 무릎이 깨져 피가
흐르는 사태가 벌어졌다.
대충 딲아주고 있는데 우리가 타야할 버스가
왔다.그 버스는 정해진
버스정류장에 서는게 아니고 도로 중앙에 섰다,
사람들은 우르르 길 중앙으로 몰려가서 그 버스를
탔고, 우리도 그 버스를 놓칠새라, 피 는 대충 훔치고 에이꼬는 아프다고 징징거리면서 나를 따라 도로 중앙으로
돌진하여 버스를탔다.
에이꼬는 잔뜩 울상이었다.무릎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날 저녁 무릎에 빨간
소독약을 바르면서 좀 찬찬히 걷지,
넘어지고 그러느냐?고
내가 한마디 했더니 에이꼬는 참았던 한마디를 내뺃었다.
'난 한국이 싫어,
도로포장도 제대로 안해놓고!
울퉁불퉁하고 툭 튀어나와서..그래서
넘어진거야' 내가
뭐라고 반론으로 할말이 없었다.
입을닫고 있는 나에게
에이꼬는 덮어두려했던일을 또 털어놓는다.
화장실에서 일을 보고 나오는데 밖에서 기다리던
할머니가 자기에게 막 핀잔을 주더란다.
자기 손주가 오줌 마려워 하는데 빨리 안나왔다고
눈을 흘기며 핀잔을 주더라는 것이다..나도
일을 봐야 나올것 아니냐는 것이다.
낮에 공중화장실에서 겪었던 일을 혼자서 삭이려하다가
엄마의 꾸지람에 진실폭로가 된것이다.
첫인상이 중요한데...,
이게 아닌데....,
무슨 민주화 운동도
아닌데, 하필이면
길거리에서 넘어지고 깨어지고 피흘리고...
외할머니 세대들의
그 일방적 모습이 또 하필 그날 그렇게 나타났는지...
그후로도 해마다
한국여행을 갔다.엄마가
생각하는것보다 딸내미는 더 예리하게 한국사회를
보며 성장해갔다. 넘어져
흘린 피는 이제는 엄마에게 얘기하지도 않고 혼자서
닦고 적당히 처리도 한다.
그렇게 성장해갔다.에이꼬
나름 한.일 틈새에서
때론 부대끼고 때론 고민하고,
그러나 친구들과 즐겁게 보낸 소학교 시절이었다.
6년의 나이테속에 딸내미본인-친구들-엄마(아빠)-한국친지들의
관계속에서 그려진 어린나무의 나이테의 지층속엔
어떤 화석이 숨어있는것일까?
그 소학교 졸업을
하던해, 그림 교실을
함께 다니며 잘 지내던 친구와 함께 한국여행을 갔다.
나도 졸업을 축하하고 격려해주고 싶은마음에서 그해봄의
여행일정은,정선
열차관광-강릉-설악산
다시 서울로 돌아오는 그런 일정으로 한국의 가족들과
모두 함께 가족 단체여행을 했다.
북한강,남한강이
만나고 합쳐 어우러 진다는 정선 아리랑의 발상지인
아우라지 나루터,정선
오일장,강릉 경포대,
동해바다, 설악산등을
돌면서 한국의 산하,정서를
느끼기를 바랬다.일본과
비슷한 산하이지만 다른정서를 품고있고 그래서 그땅에
살고있는 사람들에겐 다른 인정과 생각이 자라나는
우리 산천을 느껴주길 바랬다.
가족들과 함께 다니며
보고 먹고 떠들고 웃고 때론 재미없다는듯 시무룩한
표정을 짓는 그런 시간을 보내고 돌아오면서 내가
한국적인 정서를 알려준다고 '한'을
말해줬다. 민초들의
가슴속 응어리이자 힘의 원천인 '한'.
얘기하면서도 딸내미에게는
먹히기 어려운 얘기이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그러나
딸내미는 내 얘길 열심히 잘 듣고있었다.그리곤
답했다. 한국사회에
'한'을
극복하여 한발 한발 나아가려는 힘보다는 뭔가 다른
힘이 존재하는것을 느낀다고 했다.
우리 사회의 부조리를 지적하면서도 한편으론
우리민족의기상이랄까 그런것을
느낀다고 답했다. 생각지
않은 놀란 답변을 들었다.
그해봄 우리가 만난
산하는 아직 이쁘지 못햇다.시기적으로
꽃샘추위의 시기다.가장
이뻐야할 설악조차도 신록단장이 안된채,바람만이
세었고,동해바다도
바람과 파도가 우리를 맞이했다.그
바람을 피하려 함께 어우려져 서로 안아주고 감싸주며
경치는 얼핏얼핏 보면서 바람을 피해 좁은 눈으로
미소를 교환하고 있었다.해마다
외할머니는 식혜를 준비하여 일본외손녀를 기다리고있고,
꽃샘추위와 함께 부는 바람은 재일3세의
뼈속으로 스며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