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자와 놋숟가락 하나
고 둘 선
감자에 싹이 나서 이파리에 고구마 고구마 셧 가위 바위 보! 어린 시절 누구나 감자노래 한 구절 정도는 기본적으로 부르며 자라지 않았을까. 감자노래는 지역마다 달리 불리었다. 경남 진주가 고향인 나는 감자에 싹이 난다고 해도 왜 이파리에 고구마, 고구마 두 번 반복하면서 가위 바위 보를 외쳤는지 모른다. 아니 알려고도 의문을 가지지도 않았다. 그만큼 바보스러울 정도로 순수했다고나 할까. 추측컨대 아마도 감자에 노란 싹이 올라온 후 보송보송한 솜털에 고구마 줄기와 비슷한 보랏빛을 띄게 되면서 그런 건 아니었을까.
감자 하나를 일부러 싹이 올라오도록 베란다에 내버려두었다. 시간이 흐르자 예외 없이 감자 몸뚱이는 조금씩 쭈글쭈글 말라갔다. 노란 싹이 올라 왔다. 한 번 올라 온 싹은 줄기가 보랏빛으로 변해갔다. 목 부분은 노르스르하면서도 약간의 초록빛이 감돌았다. 머리끝 부분은 연한 보랏빛 꼬깔을 뒤집어쓴 듯했다. 어미감자의 영양분을 아낌없이 듬뿍 먹어서일까. 싹은 통통하게 살이 올랐다. 반면에 어미감자는 온 몸이 쭈글쭈글하다 못해 바싹 야윈 납덩이마냥 딱딱하게 굳어갔다.
모든 걸 내어준 후 감자는 자신의 의무를 다한 듯 생명의 불꽃은 점점 사위어 들었다. 푸르렀던 젊은 날의 흔적은 온데간데없이 서서히 몸띠를 줄여가는 감자의 모습에서 뼈만 앙상하게 남은 파리한 모습의 주름진 내 어머니를 보았다. 가난이라는 두 글자. 젊음의 패기만이 허락 된 아버지와의 결혼은 고생이란 걸 모르고 자랐던 어머니에게 여자팔자 뒤웅박 팔자라는 옛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시집 온 다음날부터 고생문이 두 팔을 활짝 벌리고 있었다. 시부모님에 사촌언니, 오빠들까지 덤으로 껴안아야 했던 삶. 일정하지 않은 아버지의 건설 현장 적은 수입으로는 많은 대 식구가 입에 풀칠하기에도 버거웠다. 오남매 자식들이 태어나자 그 삶은 더욱 곤궁해졌다. 가난의 꼬리표는 쉽게 벗겨지지 않은 올가미였다. 발버둥을 치면 칠수록 조여드는. 누군가 구원해주지 않은 이상 죽어서야 벗어버릴 수 있는 깊은 수렁이었다.
삼월이면 남쪽의 내 고향집에서는 씨감자를 파종하고 심는다. 보랏빛 감자꽃이 필 때면 보릿고개도 어느 정도 끝나간다. 그 무렵 어머니의 무명 앞치마엔 꺾어진 감자 꽃이 한가득이었다. 감자 꽃을 꺾어주지 않으면 꽃으로 영양분이 스며들어 뿌리엔 알맹이가 열리지 않기 때문이다.
여름이면 하지감자가 밥상에 자주 오른다. 그때부터 주식이 되어버린 감자를 깎는 일은 두 살 위의 언니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내 차지였다. 어머니가 조막막한 내 손으로 깎아야 하는 의무이자 당연한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때만 해도 감자를 편하게 깎을 수 있는 칼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집 안에 흔히 굴러다니는 달이 헐리듯 한 쪽이 다 닳아빠진 초승달 모양의 낡은 놋숟가락 하나로 깎았다. 커다란 함지박에는 늘 감자가 한 가득이었다. 내성적이고 바보처럼 온순한 성격이었던 나는 "엄마, 언니한테는 하나도 시키지 않고 왜 나만 감자를 깎게 해? 내가 감자 깎는 기계야?" 대들지도 못했다.
보랏빛 감자는 알이 크지도 않았고 많은 대가족이 먹고 살아가기엔 경제성이 없어서인지 어느 순간 자취를 감추고 지금의 누런색 감자로 바뀌었다. 껍질이 보랏빛 감자보다 부들부들한 누런색 감자껍질은 어린 내가 놋숟가락 하나로 깎아내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내가 깎아놓은 감자는 어머니의 손에서 몇 가지 요리로 탈바꿈 되었다. 그 중에 하나가 찐 감자이다. 가마솥에 푹 삶은 감자를 커다란 양푼에 담아 설탕가루를 뿌려 하얀 속살이 보이도록 살살 흔들어 주기만 해도 포슬포슬한 식감에, 설탕의 단맛이 함께 어우러져 입 안에서 군침이 돌았다.
밤이면 낡은 놋숟가락은 또 다른 역할이 기다리고 있었다. 해소 기침으로 고생 하셨던 이가 부실한 할머니의 무를 긁어 먹는 무 숟가락으로의 변신이었다. 어느 해 추운 겨울 밤, 유난히 할머니의 기침이 심했다. 이마에 하얀 머리띠를 동여맨 채, 늘 머리맡에 두고 먹던 무를 할머니는 볼품없는 앙상한 손으로 벅벅 긁고 있었다.
숨이 넘어갈 듯 가슴 속 저 밑에서 콜록콜록, 쌕쌕거리는 할머니의 기침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깼다. 죽음이 뭔지도 몰랐던 나는 웬지 모를 슬픔과 두려움이 앞섰다. 그렁그렁한 눈물은 이내 또르르 흘러내릴 듯했다. "할무이가 죽으면 내도 따라 죽을끼다." 속엣말을 쏟아내다 결국 훌쩍훌쩍 울먹였다. 동생이 자다 말고 울먹이는 소리에 옆에서 곤히 자고 있던 언니가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할머니는 "니도, 이 할무이가 죽으면 따라 죽을끼가?" 언니에게 물었다. 잠에서 갓 깨어난 언니는 비몽사몽이라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한참을 머뭇거렸다. 성질 급한 할머니는 참다못해 "니는, 언니가 돼갖고 동생보다 못해?" 들고 있던 놋숟가락으로 언니의 머리통을 사정없이 내리쳤다. 느닷없는 질문에 할머니에게 머리통까지 억울하게 얻어맞은 언니는 급기야 "으양" 울음을 터트렸다.
천방지축이었던 나는 뛰어다니기를 좋아했다. 걸핏하면 넘어지고 뜨거운 물에 데는 화상을 자주 입었다. 감자가 화상에 좋다는 걸 동네 만능 소식통 반장 아주머니에게 들어 익히 알고 있었던 어머니는 내가 화상을 입을 때 마다 예외 없이 그 놋숟가락으로 감자 껍질을 벗겨 즙을 내었다. 빨갛게 달아오른 화상 부위에 차가운 성질의 감자 즙이 피부에 닿는 순간 신기하게도 시원해지면서 화기도 점점 가라앉았다.
세월은 잘도 흘렀다. 내가 커감에 따라 놋숟가락은 흐르는 세월의 더께만큼 묵은 때가 덕지덕지 내려않았다. 그러면서도 놋숟가락은 묵묵히 세월의 변화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어느 날, 친정 집 대문이 나무에서 철대문으로 바뀌자 놋숟가락은 든든한 수문장 역활에서 또 다른 배역의 역활을 하고 있었다. 마당 한 쪽 귀퉁이에 자리 잡은 연탄 화로의 재를 긁어내는 재 숟가락에서 삼발이로 운명이 바뀐 것이었다. 손재주가 좋았던 팔순이 넘은 노구의 아버지가 어떻게 구부려 놓았는지. 아버지의 지혜가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감자 칼에서 할머니의 무 숟가락, 의료보조 도구, 자물통과 수문장, 삼발이의 운명이 되기까지. 놋숟가락은 나의 관심 밖에서도 쉼 없이 색다른 변화를 거듭하며 주어진 운명에, 떨쳐버릴 수 없는 숙명에 조용히 순응하고 있었다.
뜨거운 연탄불 위에서 삼발이의 역할이 끝난 놋숟가락은 앞으로 어떤 운명이 기다리고 있을까. 버려진 상태에서 여기저기 떠돌다 우리네가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자연의 이치처럼 과거의 시간을 안고, 추억의 기억을 안고 하나의 놋제품으로 거듭나기 위해 주석 22% 구리78%의 비율로 섞여 다시 볼품없는 쇳덩이로 돌아가리라. 그 쇳덩이는 어느 방짜 유기공의 손에서 다시 쇳물로 녹여질 것이다. 용암이 끓듯 1200도의 뜨거운 용해로 속에서 숯으로 불순물도 제거될 것이다. 수 없는 풀무질과 망치질이 이어진 후 지난날의 빛나는 놋숟가락으로 아니 여러가지 다양한 놋제품으로 재탄생 되어 또 다른 미래의 시간을 안고 누군가의 추억의 기억을 안을 것이리라.
감자의 일생에서 팔십 평생 자신의 모든 걸 내어주고도 더 내어주지 못한 걸 안쓰러워하시던 어머니가 지난해 가을, 이승에서 입었던 고통의 헌 옷을 하늘거리는 억새풀 사이에 묻어버리고 황금빛 수의를 입었다. '이젠, 왜 나만 감자를 깎게 했냐고?" 원망을 할 대상도 물어 볼 대상도 없다. 평생 내가 감자를 깎아도 좋으니 팔순 노구의 내 어머니가 하루라도, 단 한 시간이라도 내 곁에 더 머물게 해달라고 하늘을 향해 수없이 되뇌었으나 암세포의 공격은 잔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