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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자와 놋숟가락 하나    
글쓴이 : 고둘선    21-06-15 14:19    조회 : 5,367

감자와 놋숟가락 하나

고 둘 선

 감자에 싹이 나서 이파리에 고구마 고구마 셧 가위 바위 보! 어린 시절 누구나 감자노래 한 구절 정도는 기본적으로 부르며 자라지 않았을까. 감자노래는 지역마다 달리 불리었다. 경남 진주가 고향인 나는 감자에 싹이 난다고 해도 왜 이파리에 고구마, 고구마 두 번 반복하면서 가위 바위 보를 외쳤는지 모른다. 아니 알려고도 의문을 가지지도 않았다. 그만큼 바보스러울 정도로 순수했다고나 할까. 추측컨대 아마도 감자에 노란 싹이 올라온 후 보송보송한 솜털에 고구마 줄기와 비슷한 보랏빛을 띄게 되면서 그런 건 아니었을까.

 감자 하나를 일부러 싹이 올라오도록 베란다에 내버려두었다. 시간이 흐르자 예외 없이 감자 몸뚱이는 조금씩 쭈글쭈글 말라갔다. 노란 싹이 올라 왔다. 한 번 올라 온 싹은 줄기가 보랏빛으로 변해갔다. 목 부분은 노르스르하면서도 약간의 초록빛이 감돌았다. 머리끝 부분은 연한 보랏빛 꼬깔을 뒤집어쓴 듯했다. 어미감자의 영양분을 아낌없이 듬뿍 먹어서일까. 싹은 통통하게 살이 올랐다. 반면에 어미감자는 온 몸이 쭈글쭈글하다 못해 바싹 야윈 납덩이마냥 딱딱하게 굳어갔다.

 모든 걸 내어준 후 감자는 자신의 의무를 다한 듯 생명의 불꽃은 점점 사위어 들었다. 푸르렀던 젊은 날의 흔적은 온데간데없이 서서히 몸띠를 줄여가는 감자의 모습에서 뼈만 앙상하게 남은 파리한 모습의 주름진 내 어머니를 보았다. 가난이라는 두 글자. 젊음의 패기만이 허락 된 아버지와의 결혼은 고생이란 걸 모르고 자랐던 어머니에게 여자팔자 뒤웅박 팔자라는 옛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시집 온 다음날부터 고생문이 두 팔을 활짝 벌리고 있었다. 시부모님에 사촌언니, 오빠들까지 덤으로 껴안아야 했던 삶. 일정하지 않은 아버지의 건설 현장 적은 수입으로는 많은 대 식구가 입에 풀칠하기에도 버거웠다. 오남매 자식들이 태어나자 그 삶은 더욱 곤궁해졌다. 가난의 꼬리표는 쉽게 벗겨지지 않은 올가미였다. 발버둥을 치면 칠수록 조여드는. 누군가 구원해주지 않은 이상 죽어서야 벗어버릴 수 있는 깊은 수렁이었다.

 삼월이면 남쪽의 내 고향집에서는 씨감자를 파종하고 심는다. 보랏빛 감자꽃이 필 때면 보릿고개도 어느 정도 끝나간다. 그 무렵 어머니의 무명 앞치마엔 꺾어진 감자 꽃이 한가득이었다. 감자 꽃을 꺾어주지 않으면 꽃으로 영양분이 스며들어 뿌리엔 알맹이가 열리지 않기 때문이다.

 여름이면 하지감자가 밥상에 자주 오른다. 그때부터 주식이 되어버린 감자를 깎는 일은 두 살 위의 언니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내 차지였다. 어머니가 조막막한 내 손으로 깎아야 하는 의무이자 당연한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때만 해도 감자를 편하게 깎을 수 있는 칼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집 안에 흔히 굴러다니는 달이 헐리듯 한 쪽이 다 닳아빠진 초승달 모양의 낡은 놋숟가락 하나로 깎았다. 커다란 함지박에는 늘 감자가 한 가득이었다. 내성적이고 바보처럼 온순한 성격이었던 나는 "엄마, 언니한테는 하나도 시키지 않고 왜 나만 감자를 깎게 해? 내가 감자 깎는 기계야?" 대들지도 못했다.

 보랏빛 감자는 알이 크지도 않았고 많은 대가족이 먹고 살아가기엔 경제성이 없어서인지 어느 순간 자취를 감추고 지금의 누런색 감자로 바뀌었다. 껍질이 보랏빛 감자보다 부들부들한 누런색 감자껍질은 어린 내가 놋숟가락 하나로 깎아내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내가 깎아놓은 감자는 어머니의 손에서 몇 가지 요리로 탈바꿈 되었다. 그 중에 하나가 찐 감자이다. 가마솥에 푹 삶은 감자를 커다란 양푼에 담아 설탕가루를 뿌려 하얀 속살이 보이도록 살살 흔들어 주기만 해도 포슬포슬한 식감에, 설탕의 단맛이 함께 어우러져 입 안에서 군침이 돌았다.

 밤이면 낡은 놋숟가락은 또 다른 역할이 기다리고 있었다. 해소 기침으로 고생 하셨던 이가 부실한 할머니의 무를 긁어 먹는 무 숟가락으로의 변신이었다. 어느 해 추운 겨울 밤, 유난히 할머니의 기침이 심했다. 이마에 하얀 머리띠를 동여맨 채, 늘 머리맡에 두고 먹던 무를 할머니는 볼품없는 앙상한 손으로 벅벅 긁고 있었다.

 숨이 넘어갈 듯 가슴 속 저 밑에서 콜록콜록, 쌕쌕거리는 할머니의 기침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깼다. 죽음이 뭔지도 몰랐던 나는 웬지 모를 슬픔과 두려움이 앞섰다. 그렁그렁한 눈물은 이내 또르르 흘러내릴 듯했다. "할무이가 죽으면 내도 따라 죽을끼다." 속엣말을 쏟아내다 결국 훌쩍훌쩍 울먹였다. 동생이 자다 말고 울먹이는 소리에 옆에서 곤히 자고 있던 언니가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할머니는 "니도, 이 할무이가 죽으면 따라 죽을끼가?" 언니에게 물었다. 잠에서 갓 깨어난 언니는 비몽사몽이라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한참을 머뭇거렸다. 성질 급한 할머니는 참다못해 "니는, 언니가 돼갖고 동생보다 못해?" 들고 있던 놋숟가락으로 언니의 머리통을 사정없이 내리쳤다. 느닷없는 질문에 할머니에게 머리통까지 억울하게 얻어맞은 언니는 급기야 "으양" 울음을 터트렸다.

 천방지축이었던 나는 뛰어다니기를 좋아했다. 걸핏하면 넘어지고 뜨거운 물에 데는 화상을 자주 입었다. 감자가 화상에 좋다는 걸 동네 만능 소식통 반장 아주머니에게 들어 익히 알고 있었던 어머니는 내가 화상을 입을 때 마다 예외 없이 그 놋숟가락으로 감자 껍질을 벗겨 즙을 내었다. 빨갛게 달아오른 화상 부위에 차가운 성질의 감자 즙이 피부에 닿는 순간 신기하게도 시원해지면서 화기도 점점 가라앉았다.

 세월은 잘도 흘렀다. 내가 커감에 따라 놋숟가락은 흐르는 세월의 더께만큼 묵은 때가 덕지덕지 내려않았다. 그러면서도 놋숟가락은 묵묵히 세월의 변화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어느 날, 친정 집 대문이 나무에서 철대문으로 바뀌자 놋숟가락은 든든한 수문장 역활에서 또 다른 배역의 역활을 하고 있었다. 마당 한 쪽 귀퉁이에 자리 잡은 연탄 화로의 재를 긁어내는 재 숟가락에서 삼발이로 운명이 바뀐 것이었다. 손재주가 좋았던 팔순이 넘은 노구의 아버지가 어떻게 구부려 놓았는지. 아버지의 지혜가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감자 칼에서 할머니의 무 숟가락, 의료보조 도구, 자물통과 수문장, 삼발이의 운명이 되기까지. 놋숟가락은 나의 관심 밖에서도 쉼 없이 색다른 변화를 거듭하며 주어진 운명에, 떨쳐버릴 수 없는 숙명에 조용히 순응하고 있었다.

 뜨거운 연탄불 위에서 삼발이의 역할이 끝난 놋숟가락은 앞으로 어떤 운명이 기다리고 있을까. 버려진 상태에서 여기저기 떠돌다 우리네가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자연의 이치처럼 과거의 시간을 안고, 추억의 기억을 안고 하나의 놋제품으로 거듭나기 위해 주석 22% 구리78%의 비율로 섞여 다시 볼품없는 쇳덩이로 돌아가리라. 그 쇳덩이는 어느 방짜 유기공의 손에서 다시 쇳물로 녹여질 것이다. 용암이 끓듯 1200도의 뜨거운 용해로 속에서 숯으로 불순물도 제거될 것이다. 수 없는 풀무질과 망치질이 이어진 후 지난날의 빛나는 놋숟가락으로 아니 여러가지 다양한 놋제품으로 재탄생 되어 또 다른 미래의 시간을 안고 누군가의 추억의 기억을 안을 것이리라.

 감자의 일생에서 팔십 평생 자신의 모든 걸 내어주고도 더 내어주지 못한 걸 안쓰러워하시던 어머니가 지난해 가을, 이승에서 입었던 고통의 헌 옷을 하늘거리는 억새풀 사이에 묻어버리고 황금빛 수의를 입었다. '이젠, 왜 나만 감자를 깎게 했냐고?" 원망을 할 대상도 물어 볼 대상도 없다. 평생 내가 감자를 깎아도 좋으니 팔순 노구의 내 어머니가 하루라도, 단 한 시간이라도 내 곁에 더 머물게 해달라고 하늘을 향해 수없이 되뇌었으나 암세포의 공격은 잔인했다.

 시시각각으로 어머니의 목숨을, 생명을 미친 듯이 난도질 하는, 살아 있어도 살아 있다고 조차 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암세포는 끊임없이 어머니의 몸을 잠식해갔다. 감자즙으로 화기를 가라 앉혔던 어린 시절의 내 기억이 소환되었다. 부질없는 일인 줄 알면서도 베란다에 있는 감자를 깎아 강판에 갈아 즙을 냈다. 숟가락으로 즙을 떠서 누워 있는 엄마 배 위에 펴 발랐다. 거즈를 붙이고 반창고를 붙였다. 맹렬하게 공격하는 암의 화기가, 전신으로 퍼져 있는 암의 뿌리가 송두리째 뽑히기를. 그래서 어머니의 뼈가 살아나고 다시 피가 돌기를. 주술사처럼 나지막한 목소리로 주문을 외웠다. 숨쉬기조차 힘들어 하는 어머니의 고통을 일분, 일초라도 줄여주고 싶은 간절한 마음에 한줄기 희망을 걸었다. 하지만 생과 사의 운명은 그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었다. 결코 입고 싶지 않았던 검은색 상복, 머리엔 하얀 리본이 달린 머리핀을 꽂았다. 예정된 장례절차를 밟고 오열 속에 문상 오는 조문객들을 받았다. 그리고 어머닌 화장장 인생의 마지막 문이 열리고 뜨거운 불길 속에서 한 줌의 재가 되어 추모공원에 안치되었다.

 건설 현장 30년. 목수 일을 하는 남편은 우리나라 전국을 떠돌아다닌다. 그래서일까. 뚝딱뚝딱 손재주도 뛰어나거니와 오감 중에 미각이 가장 발달한 편이다. 감자요리를 유난히 좋아하는 남편은 찐 감자 한 접시만 내놓아도 다른 음식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때문에 남편의 배는 언제나 만삭이다. 그런 남편의 모습이 걱정스러워 "당신, 언제 출산할거야?" 한마디 하면 "오늘만 날인가." 들릴 듯 말 듯 혼자 중얼거리다 슬금슬금 뒤꽁무니를 뺀다. 뒤이어 내 입에서 나올 다이어트 하라는 잔소리가 듣기 싫어서이다. 25년. 한결같은 남편의 그 말, 그 행동에 나는 그냥 피식 웃고만다.

 사람마다 각기 다른 진한 삶의 냄새가 묻어나는 재래시장은 언제나 나에게 에너지를 샘솟게 한다. 에너지는 살아가는, 살아내야 하는 무거운 삶에 있어 희망이라는 단어를 따라오게 한다. 오늘도 나는 그 에너지의 기운을 만끽하며 시장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햇감자가 눈에 들어왔다. 동공이 확대됨과 동시에 내 유년의, 뜰 안에서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망설일 것도 없이 달려갔다. 하나, 둘 감자를 고르고 있던 내 손은 시간을 내달려 달려가고픈 그리운 추억과 함께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노정애   21-07-02 20:46
    
고둘선님 반갑습니다.
저희 한국산문 홈피에 글을 올렬주셔서 감사합니다.
글 잘읽었습니다.
글을 쓰시면서 느꼈을 고둘선님의 마음이 느껴졌습니다.  얼마나 아프셨을까요.
많이 힘드셨을 이야기를 담담히 잘 쓰셨습니다.

이 글에는 너무나 많은 이야기가 담겨있습니다.
감자, 놋숱가락, 어머니, 어린 시절, 할머니,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의 투병, 남편.
한편의 글에 다 담지 마시고 조금 나누어 보시는것을 어떨까요.
글의 크기와 글 꼴을 달리하신 이유가 따로 있는지요.

긴 글 쓰신다고 수고 많으셨습니다.
고둘선   21-07-03 09:04
    
노선생님 부족한 제 글을 읽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마지막 부분에 글의 크기와 글 꼴이 달라진 점은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게 아니고요. 제가 컴퓨터가 서툴러서인지 글을 쓰다보니 이렇게 바뀌어져 있더라고요. 가르침을 주신 부분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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