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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가을날의 오후    
글쓴이 : 고둘선    21-11-29 02:37    조회 : 5,662

어느 가을날의 오후 


고 둘 선

 귀뚜라미, 찌르레기, 이름 모를 풀벌레 소리가 정겨움으로 다가와 내 귀를, 내 마음을 옛 추억 속으로 소환하는가 싶더니 어느 새 고운 단풍의 거리의 가로수들은 세월의 순리 앞에 낙엽이라는 이름으로 몸의 부피를 줄여가고 있는 모습이 서글픔으로 다가온다. 겨울을 재촉하는 비가 오려는지 온종일 뿌옇던 하늘은 잿빛의 먹구름을 낮게 드리우고 있다.

 비가 오기 전에 잠시 환기도 시킬 겸, 거실 창문을 열고 모눈종이같이 촘촘한 천편일률적인 정사각형의 구멍으로 바깥 세상을 보는 게 싫어 방충망까지 활짝 열었다. 갈색 스웨터를 입은 젊은 여자가 검은 마스크를 낀 채 그림 액자인지, 사진 액자인지 모를 커다란 액자 하나를 누런 종이로 포장해 노끈으로 묶어 들고 지나가고 있었다. 그 뒤로 예닐곱 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분홍색 마스크를 낀 채 스마트폰을 보며 걸어가고 있었다. 앞서가는 젊은 여자와 거리가 있는 것으로 보아 엄마와 딸 같지는 않아 보였다. 저러다 넘어지지는 않을까. 염려하고 있던 차에 그 꼬마 숙녀는 스마트폰을 호주머니에 넣었다. 다행이다 싶었는데 아이는 맞은편 건물  입구 쪽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오후 세 시. 오늘은 정자 씨가 우리 집 앞을 지나가지 않았을까. 아니면 못 나오는 것일까. 보이지를 않았다. 돌아가신 친정어머니와 동갑이라 늘 마음이 가는 정자 씨. 그 정자 씨는 뼈만 앙상하게 남은 작달막한 키에 손뜨개로 뜬 챙이 넓지 않은 갈색 벙거지를 푹 눌러쓴, 유난히 막걸리를 좋아하는 여든하나의 할머니이다. 동네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폐지나 재활용품을 주워 고물상에 넘긴 돈으로 하루하루 근근히 생계를 이어가는 정자 씨. 힘든 형편이면서도 씩씩하게, 소탈하게  웃는 모습은 동란과 궁핍과 혁명, 유신, 새마을 운동에 이르기까지 현대사의  굵직굵직한 격동의 세월과 더불어 질곡의 삶을 이겨내야 했던 어려운 시대, 곡진한 삶을 살아 온 우리네 여느 어머니들 모습을 보는 듯하다.

 싱크대를 정리하다 유통기간이 지난 식용유가 눈에 띄어 "필요하신 분 가져다 쓰세요. 유통기간이 지난 식용유입니다."라고 메모지를 붙여 쓰레기장으로 들고 나갔다. 때마침 저만치서 정자 씨가 캐리어를 끌고 배시시 웃으며 다가왔다.

 "정자 씨, 이것 유통기간이 지난 식용유인데요. 빨랫비누 만들 때 쓰실래요?" 하니 "요즘 사람들은 물건 귀한 줄을 몰라." 한마디 내뱉곤 냉큼 받아 캐리어에 담았다. 그렇게 정자 씨가 지나가고 다시 집으로 들어왔다.

 이사철이라 간혹 부동산에서 몇몇 사람들이 집을 보러 다니는 모습이 거실 창 너머로 보였다. 새집을 장만하려고 집을 보러 다니는 사람과 셋 집을 전전해야 하는 사람들과는 표정부터 달랐다. 돈이라는 경제적인 여유가 있고 없음의 차이와 각자 짊어져야 하는 삶의 무게의 차이이리라. 십이 년 전까지만 해도 이 년에 한 번씩 주인이 다른 이름들과의 계약서의 서명. 쫓겨나기 싫어 울며 겨자 먹기로 보증금을 올려주고, 월세를 올려주고 그러다 견디지 못하면 더 저렴한 곳으로, 언덕배기로, 변두리로 옮겨 다니며 이 시대의 슬픈 자화상을 그려나갔던 내 모습이 그들의 얼굴과 겹치었다.

 바람이 예사롭지 않았다. 이중창인 거실 외 창만 닫고 조금 더 창 너머의 풍경을 보기로 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서서히 어둠이 깔리자 아침에 출근했던 차들이 하나둘 불야성을  이루며 건너편 건물 주차장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형태와 크기, 색깔, 용도 등. 제각기 모양이 다른 차들은 마치 직사각형으로 그어진 숫자판을 채우려는 듯 정확하게 주차하고 앞뒤 라이트 불은 이내 꺼졌다. 그 속에서 별처럼 작은 점 하나를 반짝이며 돌아가는 건 차 안에 달린 블랙박스뿐. 아직 들어오지 않은 빈 칸의, 네 바퀴의 차들은 어떤 모습으로 삶의 그림을 그려가고 있을지. 나로서는 알 수 없기에 인생의 물음표로 남겨두련다.

 오전의 끝자락에 틀어놓은 라디오에선 어깨가 들썩일 정도로 신나는 노래가 흘러나와 절간처럼 고즈넉함이 맴돌던 집에 사람이 살고 있음을, 온기가 있음을 느끼게 해주었다. 별다를 게 없는 매일매일의 풍경에 인류의 재앙인 바이러스(코로나19)의 습격으로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가 두 해째 마스크로 얼굴의 반을 가리고 다녀야 하는 요즘, 2021년 11월의, 저문 가을날의 오후가 여백이 아름다운 겨울을 그렇게 마주하고 있었다.



노정애   21-12-17 20:59
    
고둘선님
가을날의 풍경 잘 읽었습니다.
잔잔하니 좋았습니다.

첫째 단락에서 너무 긴 문장은 다듬으셔야겠어요
그리고 두번재 단락은 빼셔도 좋겠습니다.
정자씨 이야기는 좋았습니다.
간혹 긴 문장들이 보입니다. 조금만 다듬어 보세요.

글 잘 읽었습니다. 답이 늦어 죄송합니다.
고둘선   21-12-18 12:59
    
노 선생님
 부족한 제 글에 하나하나 가르침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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