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망증과 치매
고둘선
어쩌다 한 번 외출이라도 하려면 기본 세 번은 현관문이 제대로 잠겼는지 확인을 한다. 그것도 모자라 조금이라도 미심쩍다 싶으면 길을 가다가도 다시 되돌아 와 또 확인한다. 그런 내 모습이 답답했는지 묵묵히 지켜보기만 하던 남편이 어느 날 한마디 했다.
"그러다 문고리가 남아나겠어?"
"응, 한 번으론 모자라 두 번, 세 번 확인하는 거야." 하니 혀를 끌끌 찼다. 내가 생각해도 한심한 일이긴 하다. 분명히 뭘 하려고 부엌에 들어갔는데, 냉장고에서 뭘 꺼집어 내려고 문을 열었는데 왜 부엌에 들어갔는지, 왜 냉장고 문을 열었는지 생각나지 않을 때가 종종 있다. 그럴 땐 어김없이 "당신, 내가 왜 부엌에 들어왔지? 내가 왜 냉장고 문을 열었지?" 그에게 수시로 묻곤 한다. 그런 일이 사십 대가 지나고부터였다. 나 자신도 이렇게 되리라곤 상상하지 못했다. 어느 집인들 흔히 있는 일이겠지만, 누군들 이런 모습을 상상하면서 중년과 노후의 삶을 살지는 않으리라.
지난 가을, 늙은 호박으로 호박죽을 쑤고 씨앗은 깨끗하게 씻어 채반에 널어 베란다에서 말렸다. 가을의 시원한 산 들 바람이 밤새 다녀가고, 아침이면 햇살이 반쯤 열린 창틈으로 내려와 새들과 함께 속닥거리며 놀다 가기를 이 삼일. 바람과 햇살과 새들이 속살거리는 그들의 이야기로 호박씨가 꾸덕꾸덕 말라갈 무렵이면 손으로 까기에 가장 적당한 시기이다. 그때 나는 호박씨를 까다 말고 스테인리스 된 작은 반찬 통에 담아두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렸다. 자그마치 오 개월 동안이나.
며칠 전, 전 점심무렵, 부엌에서 음식을 만들다 간장 종지가 필요해 싱크대 상부 장 안에 있는 작은 반찬통 뚜껑을 열었다. 언제 담아 두었는지도 모르는 바싹 마른 호박씨가 어둠을 뚫고 햇살 속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내가, 이걸 왜 여기에 담아두었지?' 기억나지 않았다. 어두컴컴한 망망대해를 혼자 거니는 느낌이었다. 순간 치매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건망증과 치매의 다른 점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나중에라도 기억하는 것과 기억하지 못하는 것의 차이가 있다고 하던데.. 덜컥 겁이 났다. 그렇다면 나는 건망증일까. 치매 전조증상일까. 온종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모든 신경이 그 두 단어에만 집중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후 서너 시간쯤 흘렀을까. 어두운 밤바다 위를 방향도 없이 홀로 둥둥 떠다니는 돛단배처럼 등대의 한 가닥 희미한 불빛에 의지해 길을 잡아가듯 곰곰이 실마리를 풀어갔다. 열 손가락 마디마디 울퉁불퉁한 내 손이 단서였다. 기억 한 조각이 되살아났다. 그 호박은 거제 작은 시누이 형님이 보내 준 늙은 호박이었다. "아, 그때 내가 손가락 관절이 아팠었지!" 생각이 떠오르자 나머지 기억의 조각들은 굴비 엮이듯 줄줄이 따라왔다. 마지막 퍼즐이 완성되자 온몸의 긴장이 풀리면서 참았던 들숨과 날숨이 하나 되어 긴 안도의 한숨이 바람 빠지는 풍선처럼 입에서 새어나왔다. 푸우- 내가 치매가 아니라는 사실에, 기억해 냈다는 사실에 기뻤다. 만세를 부르고 싶었다. 동네가 떠나가도록.
때론 살면서 일부러라도 잊고 싶은 기억, 상처뿐인 기억이 있다. 하지만 다양한 원인으로 뇌의 기능이 손상되고 기억력, 언어능력, 사고력이 떨어지면서 지적 능력이 저하되는 치매는 언제나 무섭고 두려운 존재이다. 가족과 본인의 이름 석 자, 그리운 이들의 얼굴, 소중한 추억을 잃어간다는 건 슬픈 일이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병 치매. 그 슬픔을 뭐라 표현해야 제대로 하는 것일까. 치매 환자들은 내 주변에서도 심심치 않게 본다. 볼 때마다 남의 일이 아님을 실감하는 현실에 나 자신을 뒤돌아보며 나의 뇌에게 부탁의 말을 건넨다. '사는 날까지 건강하게 있어달라고.'
치매 환자의 유병 기간은 병이 진단되고 보통 팔 년에서 십삼 년. 그 시간은 환자 본인뿐 아니라 가족들에게도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매우 고통스러운 시간일 것이다. 그 시간을 말이나 글로 표현할 수 있는 활자가 있다고 하나 아픔 자체가 사그라들지는 않는다. 오롯이 가족의 사랑으로 켜켜이 눌러 담아 삭혀야 하는 인내만이 어둡고 긴 터널의 시간을 건너게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일 뿐.
그러나 그 인내에도 분명히 한계가 있다. 때로는 폭포수가 되어 흘러내리기도 하고 분노의 도화선이 되어 하늘로 치솟기도 하면서 끈질기게 괴롭히는 것 또한 인내의 또 다른 얼굴이지 않을까. 인내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덕지덕지 세월의 딱지가 내려앉기 마련일 터. 그러면서 조금씩 무디어지고 잊혀간다는 건 어쩌면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불행 중 다행이리라.
시간에 의해 발효되고 숙성되는 건 음식만이 아닐 것이다. 독기 있는 말과 행동도 마음 속에서 숙성되면 향기를 내뿜는다. 치매라는 병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악화되는 게 아니라 발효되고 숙성되어 향기를 품어내는. 세상에서 가장 슬픈 병이라는, 너울을 벗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향기로운 병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게 될 날을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