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관
고 둘선
우리 집은 열두 세대가 옹기종기 모여 사는 다세대 맨 아래층이다. 아래층에 살다 보니 계단을 오르내리거나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 드르륵, 드르륵 수시로 출입구 현관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 다양한 사람들의 삶의 소리가 그치지 않는다. 그 소리를 소음으로만 여긴다면 정신적인 스트레스만 가중될 뿐. 그 소리도 삶이 내는 삶의 소리이기에 나는 별다른 거부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아니, 여러 사람들이 일정하지 않는 간격을 두고 함께 어울려 내는. 음의 높낮이가 다른 타악기의 합주로 들린다면 조금은 과장된 표현이려나.
각 세대 개별 현관문을 열어젖히고 사람들이 내딛는 발걸음 소리는 그 사람이 하는 일에 따라 달라진다. 이른 새벽 건설 현장 일을 하는 남편이 작업화를 신고 뚜벅뚜벅 계단을 밟고 내려가는 소리. 뾰족 구두를 신고 또옥 똑똑 소리를 내며 바쁘게 직장으로 출근하는 윗집 아가씨들과 재잘거리며 등교하는 아이들의 가벼운 발걸음 소리.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주부들의 잔잔한 발걸음 소리. 그렇게 오전 시간이 지나면 퀵서비스나 택배를 배달하는 아저씨들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온다. 다다닥, 다다닥 그들의 발걸음 소리는 시간과의 싸움이기에 빠를 수밖에 없다.
2년 전 기억 하나가 소환된다. 코로나19가 퍼지면서 그는 건설 현장 일을 잡을 수가 없었다. 확진자가 나오는 바람에 간신히 잡은 현장 일은 바로 중단되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그는 음성이었다. 사회적 거리두기, 개인 위생에 철저했기에 당연한 결과였으리라. 하지만 일하고 싶어도 일거리가 없었다. 경북, 대구 지역에서 일했다고 하면 모두가 꺼리고 외면했다.
가장으로서 가만히 있을 수도 없었다. 아침밥만 먹으면 그는 무작정 현관문을 열고 나섰다. 어디로 가야할지 정해진 목적지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발길 닿는 대로 이리저리 떠돌다 해거름 때가 되면 사지를 축 늘어뜨린 채 터벅터벅 빌라 계단을 밟고 올라왔다. 그 발걸음 소리는 우리 집 현관 앞에서 멈춰 서곤 한참 동안 번호키를 누르지 않았다. 참다 못한 내가 문을 열어주면 그는 나와 눈조차 마주치지 않았다. 가장이라는 감투가 죄인의 감투는 아닐진대 그는 죄인 아닌 죄인의 모습이었다.
그는 매일같이 일거리를 찾아 새벽인력시장을 뛰어다니며 전화통을 붙들고 사정했다. 혹시나 하는 기대는 역시 아니었다. 허탈했다. 속된 말로 감 중에 가장 기운 빠지게 하는 감이 있다면 그건 바로 허탈감이지 않을까 싶었다. 그날도 현관문을 열고 나간 그는 오후가 되도록 들어오지 않았다.
해거름 즈음, 한 칸 한 칸 계단을 밟고 올라오는 익숙한 발걸음 소리에 내 귀는 쫑긋 세워졌다. 풀이 없는 걸음새였다. 그 발걸음 소리는 현관문 앞에서 또다시 멈춰 섰다. 번호키를 누르는 움직임조차 없었다. 바닷속으로 깊이 가라앉는 것 같은 그의 고뇌와 고독이 회색의 철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만져졌다. 그가 번호키를 누르고, 문을 열고 들어오기를 잠자코 기다렸다.
그렇게 십여 분의 시간이 흘렀을까. 한 발, 한 발 느린 걸음으로 운동화 뒤축이 다 닳아 반들반들해진 신발을 신고 오던 길을 되돌아 나가는 발걸음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그 소리는 점점 멀어졌다. 어디로 가는 것일까. 어느 골목 한쪽 귀퉁이에서 서성이고 있지는 않을까. 온갖 상념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후 두어 시간이 흐르자 빌라 계단을 다시 밟고 올라오는 그의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처진 느낌의 풀이 없는 발걸음 소리와는 차원이 다른 경쾌함이 묻어났다. 여섯 자리 현관문 번호키를 누르는 손가락의 움직임에서도 신이 났다. 문이 열리고 첫 발을 디딤과 동시에 미닫이 중문을 열며 개선장군처럼 외치는 그의 한마디. "나, 내일부터 일나가. 작업복 좀 챙겨줘!" 그 말에 내 손이 덩달아 바빠졌다. 요즘 그는 지방 출장 일을 끝내고 집에서 출퇴근한다.
저녁이 되면 출입구 현관문 여닫는 소리에 이어 계단을 밟고 올라오는 소리는 출근 때와는 또 다르게 들려온다. 하나같이 발걸음 소리에 힘이 없고 강약도 없다. 경쾌함도 없다. 이른 새벽에 출근해 밤늦도록 일을 해야 하는 세대도 많기에 퇴근 시간도 일정하지 않다. 세대 별로 약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삐삐빅, 삑삑삑~" 현관 비밀번호키 누르는 소리조차도 힘없이 들려온다. 몸이 지쳐 있기에 손가락의 움직임이 빠를 순 없으리라.
오후 여섯 시. 뚜벅뚜벅 뿌연 먼지에 얼룩진 작업화를 신고 피곤함에 지쳐 늘어진 어깨로 계단을 밟고 올라오는 소리가 들려온다. 발뒤꿈치에서 아치를 지나 양쪽 다섯 발가락에 온몸의 하중을 싣고 올라오는 그 소리에 저녁 준비를 하고 있던 나는 습관처럼 물묻은 손부터 앞치마에 닦는다. 부엌에서 현관 앞까지는 열걸음 남짓. 그가 번호키를 누르는 사이 나는 이미 현관 앞으로 마중을 나가 있다. 그리고 변함없는 인사말을 그에게 건넨다. "오늘도 수고하셨습니다."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