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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름 (수정본)    
글쓴이 : 고둘선    21-09-15 03:10    조회 : 5,995

 구름

고둘선

 맑았던 하늘에 검은 구름이 드리운 걸 보면 그냥 한 차례 지나가는 소나기를 뿌릴 것 같지는 않았다. 얼마나 많은 비를 머금었기에 저토록 먹구름이 가득할까. 거실 창 방충망까지 활짝  열어젖혔다. 검은 구름은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저 정도이면 폭우 수준에 가까운 비가 내리지 않을까. 내심 걱정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지나지 않아 비는 바로 거실 창으로 들이쳤다.

 서둘러 창을 닫았다. 서울 중부지방이 이 정도이면 시골은 괜찮을까. 힘들여 지어놓은 한 해 농사가 많은 빗물에 휩쓸려 내려간다면 실망이 클 텐데. 경남 하동에서 배 과수원을 하시는 큰 시누이 형님에게 먼저 전화를 걸었다.

 "형님, 거기는 괜찮아요? 여기는 비가 억수같이 쏟아져요."

 "응, 여기는 조금 전까지 쏟아지다가 지금은 거쳤어."

 "어휴, 다행입니다.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요." 하자 형님은 모든 게 하늘의 뜻이잖아. 이제는 하늘의 명을 기다릴 수밖에." 형님과의 통화가 끝나고 딸기 하우스를 하시는 아주버님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아주버님, 하우스는 괜찮아요?"

 "예, 괜찮십니더. 거기도 비 많이 오지예?"

 "예, 여기도 많이 오기는 하는데 아까보다는 덜 와요." 했더니 털털한 성격의 아주버님은 "한두 해 농사짓는 것도 아니고 비도 올 만큼 오고 안 오겠지예." 큰 시누이 형님과 말은 다르지만, 마음을 비운 모습은 세상을 초월한 듯 한결같았다.

 그 여유로움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스물여섯. 군대를 갓 제대한 남편은 답답한 시골에서의 삶이 싫어 야간열차를 타고 무작정 상경했다. 새벽 네 시. 밤새 달려온 열차는 희붐하게 밝아오는 서울역으로 미끄러지듯 서서히 진입했다. 뒤척이다 잠에서 깨는 그는 부스스한 얼굴로 열차에서 내렸다. 기거할 곳도, 반겨주는 이도 없었다. '청춘' 두 글자 테두리 안에서 맨몸으로 시작해야 했다. 초행길이라 삐죽삐죽 느린 걸음으로 서울역 역사를 빠져나오기 전 그는 가판대 일간지부터 뒤적였다. 숙식이 가능한 아르바이트 자리는 쉽사리 구해지지 않았다. 여기저기 헤매던 끝에 겨우 한 곳. 햄버거 가게에 취직했다. 그러나 행복도 잠시였다. 가게는 불이 났고 그는 또다시 거리로 나서야 했다.

 낮선 도시가 뿜어내는 휘황찬란한 거리의, 네온사인의 불빛 속에서 목구멍이 포도청이란 말이 실감 나는 현실은 견디기 힘들었다. 어디로 가야 할까? 생각조차도 사치로 느껴졌다고 했다. 몸은 가만히 있는 것보다 한 걸음이라도 더 움직여야 살아갈 수 있는 길이 열릴 것 같았다고 했다. 그러나 그의 지친 몸을 누일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기독교에서 운영하는 생활관이 눈에 들어왔다. 지인의  도움이었다. 정말 우연한 만남이었다. 어디가서라도 굶어 죽지는 않을 거라는, 식복 하나는 타고 났다고 하더니 그 말이 사실이었을까. 지인이 건설 현장 일을 하고 있어 무심코 흥미 삼아 따라간 그곳에서 두툼하면서도 뭉툭한 그의 손을 유심히 살펴본 감독이 "현장 일 하나는 잘 하겠구먼!" 하면서 일을 맡겼다. 잡부 일이었다. 가진 기술 하나 없었기에 잡부 일은 당연했으리라. 그 후 그는 살기 위해, 아니 살아 내기 위해 강산이 세 번 변한다는 긴 세월을 앞만 보고 묵묵히 한 길을 걸었다.

 그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이십 대 청춘이었던 그는 이제 오십 대 후반을 달리고 있다. 머리는 희끗희끗 눈 설이 내려않은 지 오래다. 날카로운 연장에 찍히고, 긁힌 손과 몸의 피부는 수많은 흉터와 더불어 점점 탄력을 잃어가고 눈 밑엔 지방 덩어리가 물고기의 배 모양으로 축 처져 있다. 그 모습이 아래로 축 처져 불룩 튀어나온 배 모양과 흡사해 "현실적인 부자는 못되었지만, 남부럽지 않은 몸의 지방부자는 이루었다며" 그는 너털웃음을 웃는다.

 옛 속담에 말은 태어나면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고 했던가." 고향 사람들은 말했다. 숫기 없고 내성적이었던 그가 구름처름 서울로 갔다 구름처럼 다시 고향으로 내려올 것이라고. 하지만 그는 각박했던 서울에서의 삶을 온몸으로 끓어안았다.

 구름은 두둥실 떠다니는 하얀 뭉게구름만 있는 건 아니다. 새털처럼 가벼운 새털구름, 비늘구름, 생각만 해도 화사하게 웃는 신부가 연상되는 면사포구름, 높은 하늘에 크고 둥글게 떠다니는 양떼구름, 땅 위에서 가까이 층을 이루는 안개구름, 소나기와 비를 머금은 소나기구름, 비층구름이 있다.

 건설 현장 삼십 년. 그의 인생은 역마살이 있어 때로는 훨훨 날아다니는 듯 새털처럼 가벼운 구름이었고, 한 곳에 오래 머물지 못하고 사방팔방 떠돌아다녀야 하는 양떼구름이었고 한 순간의 실수로 닥쳐온 안전사고로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헤맬 땐 예고도 없이 거세게 퍼붓는 소나기와 비를 가슴으로 품어야 했던 비층구름이기도 했다. 어느 날 그에게 물었다.

 "현장 일 힘들지 않아? 내려놓고 싶었던 적은 없었어?"라고. 그가 말했다. "구름처럼 왔다 구름같이 가는 인생 편하게만 살다 가면 무슨 재미가 있냐고." 어느 유행가 가사를 읊조리는 듯했지만, 검게 그을린 구릿빛 얼굴에 하얀 치아를 들어낸 채 씩 웃고 있는 그의 모습에서 잠시나마 인생의 여유를 느껴본다.






노정애   21-09-24 18:15
    
고둘선님
잘 고치셨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멋진 남편분을 두셨네요.
고둘선   21-09-27 14:11
    
노선생님, 부족한 제 글에 이렇게 큰 칭찬을 해주시니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
퇴고작으로 올리고 싶어 본문 내용을 다시 꼼꼼하게 살피던 와중에 부호 하나가 잘못 찍혀 있는 걸 발견해
다시 수정하고 하려고 하니 수정이 되질 않네요. 앞으로 이런 불상사가 없도록 글쓰기에 더욱 매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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