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
고둘선
맑았던 하늘에 검은 구름이 드리운 걸 보면 그냥 한 차례 지나가는 소나기를 뿌릴 것 같지는 않았다. 얼마나 많은 비를 머금었기에 저토록 하늘에 먹구름이 가득할까. 거실창 방충망까지 활짝 열어젖혔다. 검은 구름은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저 정도이면 폭우 수준에 가까운 비가 내리지 않을까. 내심 걱정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지나지 않아 후두둑 하는 소리와 함께 비는 바로 거실창으로 들이쳤다.
서둘러 창을 닫았다. 서울 중부지방이 이 정도이면 시골은 괜찮을까. 힘들여 지어놓은 한 해 농사가 많은 빗물에 휩쓸려 내려간다면 실망에 앞서 허탈감이 클 텐데. 과수원을 하시는 큰 시누이 형님에게 먼저 전화를 걸었다.
"형님, 거기는 괜찮아요? 여기는 비가 억수같이 쏟아져요."
"응, 조금 전까지 쏟아지다가 지금은 그쳤어."
"어휴, 다행입니다.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요." 하자 형님은 모든 게 하늘의 뜻이잖아. 이제는 하늘의 명을 기다릴 수 밖에." 형님과의 짧은 통화가 끝나고 딸기 하우스를 하시는 아주버님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아주버님, 하우스는 괜찮아요?"
"예, 괜찮십니더. 거기도 비 많이 오지예?"
"예, 여기도 많이 오긴 하는데 아까보다는 덜 와요." 했더니 털털한 성격의 아주버님은 한두 해 농사짓는 것도 아니고 비도 올 만큼 오고 안 오겠지예." 큰 시누이 형님과 말은 다르지만 마음을 비운 모습은 세상을 초월한 듯 한결같았다.
그 여유로움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스물여섯. 군대를 갓 제대한 남편은 답답한 시골에서의 삶이 싫어 야간열차를 타고 무작정 상경했다. 새벽 네 시. 밤새 달려온 열차는 희붐하게 밝아오는 서울역으로 미끄러지듯 서서히 진입했고 뒤척이다 잠에서 깬 그는 열차에서 내리는 순간 기거할 곳도, 반겨주는 이도 없었다. '청춘' 두 글자 테두리안에서 맨몸으로 시작해야 했다. 초행길이라 삐죽삐죽 느린 걸음으로 서울역 역사를 빠져나오기 전 그는 가판대 일간지부터 뒤적였다.
숙식이 가능한 아르바이트 자리는 쉽사리 구해지지 않았다. 여기저기 헤매던 끝에 겨우 한 곳. 햄버거 가게에 취직했다. 그러나 행복도 잠시였다. 가게는 불이났고 그는 또다시 거리로 나서야 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란 말이 실감 나는 현실은 견디기 힘들었다. 어딜 가야 할까. 생각조차도 사치로 느껴졌다. 몸은 가만히 있는 것보다 한 걸음이라도 더 움직여야 살아갈 수 있는 길이 열릴 것 같았다. 그러나 지친 몸을 누일 곳은 없었다.
기독교에서 운영하는 생활관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지인의 도움이었다. 정말 우연한 만남이었다. 어디 가서도 굶어 죽지는 않을 거라는, 식복 하나는 타고났다고 하더니 그 말이 사실이었을까. 무심코 흥미삼아 따라간 그곳에서 두툼하면서도 뭉툭한 그의 손을 유심히 바라본 건설 현장 감독이 "현장 일 하나는 잘하겠구먼." 하면서 일을 맡겼다. 잡부 일이었다. 가진 기술하나 없었기에 잡부 일은 당연했으리라.
그 후 그는 살기 위해, 살아 내기 위해 앞만 보고 묵묵히 한 길을 걸었다. 강산이 세 번 변한다는 긴 세월을. 그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이십 대 청춘이었던 그는 이제 오십 대 후반을 달리고 있다. 머리는 희끗희끗 눈 설이 내려않은 지 오래다. 날카로운 연장에 찍히고 긁힌 상처투성이인 손과 몸의 피부는 수많은 흉터와 더불어 점점 탄력을 잃어가고 눈 밑엔 지방 덩어리가 물고기의 배 모양으로 축 처져 있는 모습이 한편으론 안쓰러우면서도 푸근한 정감으로 다가온다.
옛 속담에 '말은 태어나면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고 했던가.' 고향 사람들은 말했다. 숫기 없고 내성적이었던 그가 구름처럼 서울로 갔다가 구름처럼 다시 고향으로 내려올 것이라고. 하지만 그는 각박했던 서울에서의 삶을 온몸으로 끌어안았다.
구름은 두둥실 떠다니는 하얀 뭉게구름만 있는 건 아니다. 새털처럼 가벼운 새털구름, 비늘구름, 생각만 해도 화사하게 웃는 신부가 연상되는 면사포구름, 높은 하늘에 크고 둥글게 떠다니는 양떼구름, 땅 위에서 가까이 층을 이루는 안개구름, 소나기와 비를 머금은 소나기구름, 비층구름이 있다.
건설 현장 삼십년. 그의 인생은 역마살이 있어 때로는 훨훨 날아다니는 듯 새털처럼 가벼운 구름이었고, 한 곳에 오래 머물지 못하고 여기저기 떠돌아다녀야 하는 양떼구름이었고 순간의 실수가 유발한 안전사고로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헤맬 땐 예고도 없이 거세게 퍼붓는 소나기와 비를 가슴으로 품어야 했던 비층구름이기도 했다. 어느 날 그에게 물었다.
"현장 일 많이 힘들지? 내려놓고 싶지는 않아?" 그가 말했다. "구름처럼 왔다 구름같이 가는 인생 편하게만 살다가면 무슨 재미가 있냐고." 어느 유행가 가사를 읊조리는 듯했지만 검게 그을린 구릿빛 얼굴에 하얀 치아를 들어낸 채 씩 웃고 있는 그의 모습에서 잠시나마 인생의 여유를 느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