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은 어울림이다. 소나무와 참나무가 이마를 맞대고, 진달래와 도라지가 같은 집에서 산다. 그들은 산새들에게 집을 내어 주고 바람이 지나갈 통로를 만들어준다. 도시의 삶에 지친 영혼들에게는 아낌없이 새로운 기운을 나누어 준다. 숲은 방문객을 낯가림 없이 맞이하지만 난 등산하는 걸 싫어한다. 친구들이 등산을 가자고 하면 쉽사리 동의를 하지 않는 편이다. 힘들게 오른 산을 다시 내려오는 것이 싫고 산을 오르면서 숲이 품은 친구들의 삶을 방해하고 싶은 마음도 없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는 경우에는 산 초입의 적당한 쉼터에서 주변을 구경하면서 친구들이 하산하기를 기다린다.
내가 사는 아파트 창문으로 관악산이 들어온다. 주말 한가한 시간에 관악산을 바라보면 그 산의 나무들이 춤을 춘다. 야구장에서 관중들이 파도타기를 하듯 관악산의 나무들도 파도타기를 한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바람이 지나갈 통로를 만들어주기 위해 좌에서 우로, 아래에서 위쪽으로 파도에 배가 출렁이듯이 출렁거린다. 바람이 지나가면 언제 그랬냐는 듯 자신의 자리로 돌아와 서로 살갗을 비비며 따스한 햇볕에 초록의 빛을 발산한다. 평화란 저런 것이다. 타자와 다툼이 없이 같은 마음으로 길을 터주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갈 수 있을 때 평화와 행복이 머문다는 생각이 든다.
산중의 나무들은 하늘을 향해 줄기와 초록 잎을 내어 우주의 기운을 흡입하고 땅으로부터는 대지의 기운을 받아들이는 작업을 한 순간의 쉼도 없이 행한다. 그리 바쁜 각각의 삶을 살면서도 옆의 나무와 풀에게도 삶의 공간을 아낌없이 내어준다. 너무 가깝게 다가와 부대끼면서도 불평 없이 서로 어울려 조화로운 아름다움을 만들어낸다. 숲속의 나무들은 외로움과 그리움 그리고 다툼이 없는 것 같다. 어울림과 기다림 그리고 행동만 있는 것 같다.
눈을 가까이 하면 도로와 주택가에도 가로수와 정원수가 듬성듬성 자리하고 있다. 도로변의 가로수들도 한껏 초록을 뽐내고 있다. 하늘을 향해 뻗은 가지와 녹색 잎 사이로 전선이 지나가고, 도로에는 자동차와 화물차, 그리고 버스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열을 이룬다. 그들이 뿜어내는 연기와 엔진소리에도 가로수들은 관심이 없는 것 같다. 그냥 그곳에서 자신들의 할 일을 할 뿐이란 생각이 들다가도, 자신들과 조금 떨어져 산중에서 숲을 이루며 어울려 지내는 나무들을 동경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관악산 숲의 나무와 그 옆에 위치한 도로변의 가로수의 삶이 어찌 보면 인간사를 대변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숲속의 나무는 고향을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이고 가로수는 고향을 떠나 타향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 같다. 어차피 숲을 떠날 운명이라면 공원의 조경수나 부잣집 정원수로 팔려가든지, 아니면 아파트에라도 뿌리를 내려야지 하필이면 도심의 가로수로 살아가는 나무의 팔자를 가엾다고 여긴다면 너무 감상적인가? 생각으로는 모두 숲으로 돌려보내고 싶다. 숲의 나무들이 어울림과 기다림 시간을 보내는 동안에 도로변의 가로수들은 외로움과 인고의 시간을 보내는 것 같다.
책상 위의 핸드폰이 ‘카톡! 카톡!’ 하고 주인을 부른다. 커버를 열고 확인을 한다. 학교 동창들의 그룹채팅이다. 오래 전에 동창모임에 갔었다. 그때 연락처를 적어라고 해서 핸드폰 번호를 기입했다. 그리고는 지금까지 10년이 넘도록 한 번도 참석하지 않은 모임이다. 동창회 명부에 연락처가 있어서 그룹채팅의 일원이 되었나보다. 서로 안부를 묻는다. 조용히 핸드폰 커버를 닫는다. 계속 울리는 ‘카톡’ 소리에 신경이 쓰인다. 소리를 무음으로 해 놓고 볼 일을 본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다. 궁금한 마음이 일어 카톡을 확인해보았다. 채팅 인원이 100명이 넘는다. 수십 명이 참여했다. 처음부터 주욱 읽어 본다. 기억에 남는 이름과 생소한 이름이 뒤섞여 있다. 그들이 보내온 내용들은 숲을 지나는 바람이 가져온 소식 같다. 한편으로는 보고 싶은 얼굴도 있다. 참여할까 하다 손가락을 멈췄다.
난 숲을 떠난 나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