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선이 긴 삶은 그 언저리에 추억들이 살아 움직이며 칡넝쿨처럼 엉키게 된다. 어린 시절은 호남에서 자라고, 청소년기는 부산에서 살았다. 상경하여 대학생활을 하고 첫 직장은 충청도의 천안에서 시작했다. 항구를 설계하는 직업이라 사시사철 동해, 남해, 서해는 물론 제주도의 바다를 찾는다. 자연스럽게 팔도 유람을 하게 된다. 휴일에는 강원도 정선의 오지마을을 자주 찾아가니 전국 팔도가 삶의 터전인 셈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참 부럽다싶다. 하지만 긴 여행에 온몸은 파김치가 되기도 하고, 낯선 일들은 삶을 힘들게 하기도 한다. 더욱 힘든 것은 저녁밥을 혼자 먹을 때다. 홀로 밥을 대하는 데는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 때론 숟가락을 가만히 놓고 소주의 힘을 빌리기도 한다. 어디에도 녹녹한 삶은 없는 것 같다.
만남과 헤어짐이 반복되다보니, 사람으로 인한 아픔에서 벗어나고 싶었을까? ‘생자필멸, 회자정리’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가슴에 와 닿는다. 이러한 감정은 어린 시절부터 싹이 텄다. 어린 시절 가족은 조부모, 부모, 형제자매, 그리고 결혼 전의 고모까지 14명의 대가족이었다. 최초의 짝은 할머니다. 할머니와 같은 방에서 먹고 자며 할머니의 품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해의 어느 날, 많은 사람들이 집에 찾아왔다. 영문도 모르고 병풍을 향해 절을 두 번 했을 뿐인데 그 다음날부터 할머니가 집에 계시지 않았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것이다. 두 번째 짝은 할아버지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가족들은 큰 방에서 모두 왁자지껄하게 웃으면서 아침밥을 먹는데, 나만 사랑방에서 할아버지와 겸상을 하게 되었다. 하루아침에 외톨이가 되었다. 할아버지는 밥상머리 가르침으로 ‘동몽선습’과 ‘명심보감’의 내용을 들려 주셨다. 나는 뜻도 모르고 ‘그런 말이 있는가보다.’라고만 생각했다. 할머니, 할아버지와 같이한 시간은 나를 내성적인 성격으로 만들었다.
초등학교 입학식은 나의 삶에서 기념비적인 날이다. 입학식 날 다른 동네 아이와 다툼이 일었다. 처음 본 선생님이 교실 앞으로 나오라고 했다. 둘이 싸워보라고 했다. 지금 생각해도 참 멋진 선생님이었다. 입학하기 전에 고등학생이던 큰 형에게 권투의 기초를 조금 배웠다. 그 애가 마구잡이로 달려들 때, 나는 고사리 주먹을 단단히 쥐고 딱 한 방, 코를 향해 쳤다. 코피를 내면 무조건 싸움에서 승자가 되던 시절이었다. 그 쌍코피 작전은 나보다 머리가 하나 더 많은 덩치 큰 급우들도 감히 도전을 할 엄두를 못 내게 만들었다. 조그만 고사리 주먹이 반에서 킹카인 친구와 짝을 만들어 주었다. 그는 공부를 도와주고 난 그의 보디가드, 환상의 궁합이었다. 그렇게 6년을 붙어 다녔다. 그 친구는 중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 서울로 이사를 갔다. 갑자기 짝 잃은 백조가 된 기분이었다. 참 많이 슬펐다. 그러나 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때 그 친구에게 했던 말이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야, 대학가서 보자.”
“꼭 편지해라.”
“그래, 알았어, 너도 잘 지내.”
끝이었다. 몇 날을 기다려도, 몇 해가 가도 편지는 오지 않았다. 간간히 그 친구가 살던 동네의 또래로부터 소식을 전해들을 뿐이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진실한 친구 세 명만 있다면 행복한 인생이라는 말을 배울 때였다. 난 영원히 변하지 않을 친구는 없다고 생각했다. 사람은 변한다는 것을 너무 일찍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배신의 싹이 점점 크게 자라는 동안 청소년기가 다 지나갔다. 제멋대로 자란 배신감은 불면이 되고 울분이 되어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와서 괴롭혔다. 그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었다. 청년이 되어서야 가까스로 벗어날 수 있었다. ‘배신감’이란 놈을 대적할만한 힘이 센 새로운 친구를 만난 것이다.
영원히 변하지 않을 친구, 그것은 ‘예수’였다. 예수의 말은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변하지 않을 것 같았다. 예수, 석가, 모하메드를 진실한 친구로 맞이했다. 당장 ’신약성경‘ 한 권을 구입해서 책상 우측 상단에 정성껏 모셨다. 예수와 친구가 되던 날, 참으로 가슴이 든든하였다.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그들은 나의 짝이다. 외로울 때나, 아내에게 핀잔을 들을 때나, 아이들에게 실망할 때나 한시도 나를 떠나지 않는다. 항상 곁에 머물면서 위로해 주고 힘이 되어 준다. 참 좋은 친구들을 만나 행복하다고 생각하며 살고 있던 어느 날 이었다.
“따르릉”
“여보세요!”
“응, 나 K야.”
어안이 벙벙했다. 헤어진 지 꼭 30년 만에 K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기쁨과 야속함과 오만가지 생각들이 순간에 스쳐 지나갔다. 그날 저녁 K와 나는 선술집에 마주 앉아 소주잔에 시간을 따라 마셨다. ‘많이 섭섭했었다.’는 나의 말에 K는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지난 삶을 펼쳐 놓았다. 시골에서 항상 1. 2등만 하던 그가 서울에 오니 반에서 중간에도 들지 못하더라는 것이다. 얼마나 창피하든지 학교가기가 싫어져서 심한 가슴앓이를 하며 중학생활을 하였단다. 부모는 자신을 뒷바라지하기 위해 시골 재산을 처분하고 서울역에서 가판 점을 하였다고 한다. 꿈이 가득했던 고향을 명문대 졸업장과 바꾼 기분이라고 했다. 그의 눈가에는 공허한 중년의 슬픔이 맴돌았다. 대기업의 북유럽 지사장으로 근무하고 있다가 최근에 본사근무를 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의 삶은 나의 시간과 대조를 이루며 ‘어디에도 편한 인생은 없구나.’라는 탄식과 함께 그에게 연민의 정을 느끼게 만들었다.
30년 동안 쌓인 세월의 잔을 비우기에는 하룻밤은 너무 짧았다. 새벽달이 서쪽 하늘에서 합석을 하였다. 찬 공기가 가슴을 타고 내려가자 오랫동안 웅크리고 있던 ‘배신’이란 놈이 사라졌다. ‘믿음’이란 친구가 찾아와서 말했다, 삶은 기다림이라고.
갑자기 얼굴이 달아올랐다.